들길

고추모가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올듯 올듯한 비도 바람만 불뿐 소식이 없다.
힘겹게 땅에 내려앉은 이 조그만 모종이 소식없는 빗소리에 심한 몸살이 오는가 보다. 온몸과 잎은 축 늘어지고 물기 없는 모습으로 헉헉거리고 있다.
친정을 지척에 두고도 찾아 오질 못하다 오랜만에 오는 길이다. 어둑어둑 해 질쯤 집에 도착 했으나 불도 켜 있지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차를 몰아 다시 엄마가 계실 곳으로 갔다.
터덜터덜 거리는 들길을 따라 밭에 웅크리고 앉아 일하고 계실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메어진다.
일년여 동안 난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추운 겨울,병석에 계시던 친정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봄이 채 오기전 친정엄마도 교통사고로 다리수술을 받고 가을이 올때까지 뽀얀 얼굴로 병원에 계셨다. 병원 유리창 너머 들길에 눈빛이 가있고 ‘언제 저 길을 걸어가 볼까’혼자 말씀처럼 하시곤 했다.
그러다 비오는 가을날 시아주버님의 사고 소식은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오지못할 길을 떠나버린 큰 아들을 그리워 하던 시아버님도 그리움에 목이 타들어 가듯, 생도 그렇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곤 그렇게 땅속에 묻히셨다.
나와 남편은 우리 자신도 추스리기에 버거웠으나 양쪽집 모두 혼자 계시는 어머님들 때문에 가슴아파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친정엔 형제도 많고 가까이들 살고 있으니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지만 시어머님은 달랐다.
형제도 별로 없는데다 이제 맏이나 다름없는 우리가 모든일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아주 오랫동안 와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친정집에 많지도 않은 논 형제끼리 모여서 손으로 모를 심는다기에 큰맘먹고 오는 길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어스므레한 밭 한 가운데 친정엄마의 절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으로는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눈물이 쏟아질것 같아 천천히 걸어갔다.
땅 한평없이 가난한 집에서 일곱남매를 힘겹게 키워내신 엄마!
“돈 많이 벌어서 땅 많이 사줄께” 철부지 약속을 했던 나는 땅은 커녕 제대로된 딸 노릇 한번 못했다.
어쩌다 전화라도 할라치면 시어머님 걱정부터 하시며 당신 신경쓰지 말고 시집에 잘 하라는 가슴타는 말씀만 하신다.
‘시어머님 공경하며 잘 살면 그게 나한테 하는 효도야’
마른 날씨인데도 들길에 풀들은 잘 자란다. 양수기에서 털털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이 쏟아진다. 모래논에 물이찬다.
하늘에서도 내 마음속에서도 물이 쏟아지길 바래본다.
엄마를 부축하고 손을 잡으며 이 들길을 둘이서 오래도록 걸어 볼수 있으면 한다.
한발짝 한발짝 엄마에게 다가가 소리친다.
“엄마! 저 혜숙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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