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숙

요즈음은 모임에 나가면 비자금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남편과 자식이 모르는 돈, 비자금을 얼마나 조성했느냐가 오십대 초로에 들어선 여자들이 누리는 부의 상징이다.


젊을땐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남편이 승진을 하고 사업이 번창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게 자랑거리였다.

이젠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남편이 부자건 자식이 출세를 했건 아랑곳 없이 비밀리에 만든 오직 나만의 돈 자랑이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 돈 때문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도 내 놓지 않는다고 하고, 살림만 하면서도 꽤 많은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스스로를 대견해 하기도 한다. 하루 얼마씩 남편 몰래 일수 찍는 재미에 산다는 나같이 장사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비자금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온다는 이도 있다.


내 또래의 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대상은 나 같은 여성 사업자다. 불과 십년전만해도 돈좀 그만 벌어라. 치장 좀 하고 다녀라 돈벌어 뭐할거냐, 그렇게 일만 하다가 늙어서 어떻게 할거냐고 했었다.


요즘은 30년 동안 돈을 만졌으니 비자금이 최소한 억은 될거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얼마나 되나 자기에게만 알려달라고 귀를 대는 이도 있다. 그 만한 액수면 남편이나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다.


돈이란 돌고 돌아야지 여자들이 꽁꽁 묶어 놓고 있으니 이 나라가 발전하겠느냐고 유머로 받아 넘기기 한다. 그러나 속내는 꼭 그런건만은 아니다. 나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지난 봄 작은 아들을 결혼 시키고 나서부터다. 큰 아들에게 기댈 수 없는 나는 작은 아들에게 잠정적으로 기대고 살았다. 그런데 딸만 둘인 집안에 큰 사위로 어린 아들을 내 주었다. 처갓집 아들 노릇, 친가에 장남노릇 까지 떠맡은 작은 아들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내 마음도 허전 할 때가 많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많은 식솔들 치다꺼리, 이러다가 내가 일손이라도 놓게 된다면 ‘여태껏 수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하리다.’하고 나설 형제, 자매, 자식들 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초년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속에 30년의 세월을 보냈다.

친정에선, 돈 때문에 울근불근하면 들어오던 복도 나간다고 배웠다. 돈 관계에 있어 일체 여자들이 큰소리치지 못하도록 했던 친정아버지다. 결혼하고 나서는 그 집에 경제 관리는 한사람이 해야 한다며 십오년 동안 경제권을 넘겨주시지 않았다.


농사꾼적인 친정아버지의 지론과 장사꾼적인 시어머님의 지론사이에서 내 경제개념은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비자금을 조성하려고도 시도해 봤지만 어줍잖이 모았다가 들키면 어쩌나 겁도 나고 집안에 돈 쓸 일이 생기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내 놓게 되는 일이 많았다.


이제 좋은날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살기엔 내가 너무 늙어 버렸다.

비자금 한푼없이 이대로 살다가, 십년후에 내 모습을 그려 보면 나오는 건 한숨이요 흐르는건 눈물뿐이었다. 남편이 살가우니 믿고사나 자식들이 잘하니 믿고 사나 그렇다고 돈이 많아 믿고 산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 좋은날이 왜 나만 비껴갔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낭보가 날아들었다.

개띠 해의 첫 신호를 알리는 지난 1월초에 남양주 시청에서 친정아버지의 명의로 된 논이 택지 개발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지방 대도시의 고급 아파트는 아니라도 중소형 아파트 한 채 값이 나에게 돌아 왔다.


친정아버지 살아생전에 말씀처럼, 울근불근 하지 말고 제 몫 찾아가라는 큰 오라버니 엄명에, 어겨 본적은 없지만 더 순종했다.

왜냐하면 “딸들은 포기해라.”명령이 번복 할까봐서다.


설날에 남편, 아들과 며느리, 딸 사위 모아 놓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깨 펴고 살라고 우리 아버지가 주신 돈이다. 아무도 손대지 말아라. 아버지 믿듯 이 돈 믿고 살란다. 딸이 한마디 거든다 “엄마! 그 목소리가 둬달전 힘없던 목소리유. 돈이 좋긴 좋구나. 처녀 목소리라고 해도 곧이 듣겠네


팔 다리는 거뜬해지고 머릿속은 맑아졌다. 여기를 봐도 웃고 싶고 저기를 봐도 웃음이다. 내 몸에서 오십대 답지 않게 무한한 힘이 뻗쳐 나오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낀다.


시집식구와 자식들 치다꺼리에 좋은 세월 다 보낸 우리다. 거기다가 불안한 노후까지 책임져야 하는 초로의 여인들에게 있어 비자금은 무한한 에너지원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혼자 즐거워하고 혼자 든든해 한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알면 재미야 덜 하겠지만 그래도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나쁘게만 보지 말고 비자금 조성 쪽으로 가족들이 힘을 모아 준다면 왕비처럼 살 것이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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