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분


멀리 산 너머로 물러가던 소나기가 되돌아와 또다시 비를 퍼붓고 가는 여름, 섶을 타고 담장으로 기어오르던 호박넝쿨이 어느새 헛간 지붕까지 덮어버렸다.


칠월의 거센 장마가 물러간 뒤, 기세 좋게 뻗어가는 넝쿨 사이로 등불처럼 노랗게 피워 올린 호박꽃!  들에서 돌아와 지친 몸으로 들어서는 내 집 골목에서 호박꽃을 보는 순간  화들짝 느껴지는 반가움에  가까이 다가섰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또는 해질녘,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들을 기다리며 따스한 등불을 밝혀놓은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고즈넉한 여름 한낮, 고샅 터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호박꽃을 보며 잠시나마 빠져보는 망중한의 그리움이 눈물겹다.


가난하고 궁색했지만 즐거웠던 유년 시절과, 오래 잊고 지냈던 고향의 소꿉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름답고 정겨운 추억과 연상들을 불러오는 호박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새삼 왕자처럼 우아하고  늠름한 기품에 빠져든다.


그런데 누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못생긴 여자를 비유해서 모독하는가.

장미나 모란처럼 화려하거나 요염하지는 않지만 대신 다른 꽃과는 견줄 수 없는 소박한 정서와 다산성을 지닌 꽃이다.


비록 원산지가 아프리카 열대 지방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한국의 정서에 가장 알맞은 것 중 세 가지를 꼽으라면 단연 호박꽃을 으뜸으로 치고 싶다.


그 하나가 가을의 산정을 미끄러지듯 달리는 달과, 지금은 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었지만 별이 쏟아지는 여름 밤, 초가지붕 위에서 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채 소복의 여인처럼  피어있는 박꽃, 그 중에 호박꽃의 백미는 돌담울이나 나무 울타리, 옥토박토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푸르고 왕성한 넝쿨을 뻗어가며 한 몸으로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정서에 있다.


거기다 다산성으로 이어지는 풍성한 열매는 우리의 식생활과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오히려 돋보이지 않는 식품이다.

그리고 호박이 지닌 약효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으리라.

비오는 날, 날궂이 음식으로 애호박을 따다 숭숭 채 썰어 넣고, 풋고추와 부추에 버무려서 부쳐 먹는 빈대떡은 서민들의 기호에 가장 알맞은 식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으니 그 또한 미덕이다.


그 뿐이랴. 긴긴 여름 뜨거운 태양아래서 온갖 시련을 견디며 돌담이나 울타리 위에 구도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동안, 그의 몸은 황금빛 궁 안에 다이아몬드 같은 씨앗을 품으며 둥글고 단단하게 여물어간다.

그리하여 첫서리가 내리기 전 어느 날, 주인마님이 거처하는 안방이나 거실에 천연덕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모습은 사뭇 후덕하고 편안한 이웃 집 아낙 이다.


보라! 이렇게 지구처럼 둥글어지는 것.

그리고는 한겨울을 골똘한 사유로 깊어져가는 것이다.

긴긴 여름 한낮, 담장마다 노랗게 피어있는 호박꽃을 보면, 고향의 정경이 한눈에 그려지는 백수 정완용 선생님의 시조 한 수를 절로 읊어보게 된다.


호박꽃을 들여다보면

벌 한 마리 놀고 있다.

호박꽃을 들여다보면

초가삼간이 살고 있다

경상도 어느 산마을

노란 등불이 타고 있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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