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분

절기상으로는 오늘이 입추인 동시에 음력 날짜로는 칠월 보름이다.

그래서일까. 계속되는 열대야 속에서도 밤하늘은 넓고 성큼 높아져있다.

또다시 아들을 타국으로 떠나보낸 후, 마음이 착잡한 탓에 잠을 이룰 수 없어 뜰로 나선 참이다.


지금쯤 고도의 상공 어디를 날고 있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중천에 떠있는 보름달이 유난히 밝은 가운데, 마당을 가로질러온 달빛이 그윽하게 향기를 뿜어내는 문주란 꽃에 닿아있다.

그 향기에 이끌려 꽃 가까이 얼굴을 대면서 조만간에 가뭇없이 사라질 자취를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꽃처럼 사랑스럽고 반갑던 가족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짧게만 느껴지고 ,이별은 왜 그리 지는 꽃처럼 빠르게 찾아오는지 안타깝다.

지난 한 달은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도 즐거운 나날이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이 제 아내와 아기까지 데리고 모처럼 귀국해서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고, 그 일을 기념이라도 하듯, 때맞춰 문주란이 중심에서 꽃대를 뽑아 올리더니 활짝 피어난 것이다.


제주에서만 자생한다는 문주란은 상록 다년초 수선화과로서 칠년 정도 자라야만 꽃을 볼 수 있다는 식물이다.

그런데 무려 팔년이 되도록 꽃을 보여주지 않던 문주란이 드디어 몸을 열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행운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하며 감격으로 환호했다.

거듭되는 월동 기간에 제대로 관리를 해주지 못하고 방치 상태로 놓아둔 탓에 자칫 동사할 위기에 처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런 소홀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백합처럼 우아한 자태와 흰 꽃으로 짙은 향기를 유감없이 뿜어내다니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마치 우리 가족의 해후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고 말미를 끝낸 아들은 오늘 뉴질랜드로 떠났다.


떠날 때는 언제나 서로에 대한 애틋한 염려와 작별에 따른 아픔을 남기지만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 많은 짐들을 꾸려서 떠난 뒤, 아들이 머물던 방에 들어가 보니 보이지 않는 자취만 더욱 크게 느껴질 뿐,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나는 아들과 함께 감동으로 바라보던 문주란을 오래 들여다보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이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민 생활에 온갖 고통이 따를지라도 굳굳하게 살아가주길,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온전한 향기로 품은 채 살아가주길 간절한 심정으로 빌면서 꽃 속에 얼굴을 묻는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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