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이상옥,노인회장 김장일,새마을지도자 김두일,부녀회장 김영순,총무·개발위원장 남진원

강당말 마을전경사진
강당말 마을전경사진
 


음성읍에서 금왕 방면으로 가다보면 감우재 아래 오른편으로 아늑하고 정감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선다.

양지바른 산아래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을 주민들간의 인정도 훈훈하고 소박한 사정1리 마을이다.


□ 강당마을의 유래


강당마을은 한강의 상원지류를 앞으로 하고 차령과 노령의 정기서린 부용산 기슭에 자리잡은 安東金氏세거지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모래톱에서 일정량의 물이 솟는 모래 우물이 있어 모래샘 또는 沙井이라 하였다. 금소목이는 음성현의 金村部曲으로 쇠를 다루던 곳이며, 신라때부터 통쇠로 농기구를 만들던 퉁뱅이들이 모여살아 부곡이 형성되었고, 음성지역에서는 씨족이 마을을 이룬 가장 오래된 텃골로 文씨 慶씨가 부자소리를 들으며 살던 문경 텃골이었다. 안동김씨의 시조, 金宣平의 18대손 군자감정 김혜께서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등극하자 불만을 품고 낙향하시어 터를 잡고 살면서 부락입구에 강당을 짓고 주변에 느티나무를 심으시고 후손을 가르치셨다.


1907년 가을 의병을 쫓던 왜병들의 방화로 강당이 소실되었던 것을 1939년 봄 현 위치로 이전 개축하여 강당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에 부락의 안녕을 빌며 제사를 지내던 서낭당이 있어 지금도 불상사가 없는 살기 좋은 평화스런 마을이다. 1914년 강당말, 내촌, 벌터를 합하여 沙丁里로 명명하고 1956년 읍으로 승격되여 독립 里가 되었다. 1962년 새마을운동 시작으로 안길 40m를 확장하고 젊은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지게로 돌을 운반하여 재건탑을 세우고 지붕, 담장, 아궁이를 개량하여 전국 최초로 모범부락이 되었다. 1967년에는 마을회관 30평을 건립하고 1990년 주민과 출향인사가 한마음으로 농로 2,130m를 포장하고 1995년 경로당 22평을 신축하였다. 옛 근서면 사정리 당시 87호에 406명이 거주하다 현재는 45호에 130명이 살고 있다.


□ 용대마을의 유래


음성은 삼한시대에 마한의 50여국 중 하나인 지침국에 속했으며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음성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4개면을 이루었고 그중 沙亭里는 근서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일제하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벌터, 안말, 강당말, 용대동 등의 마을이 합쳐 지금의 沙丁里로 명명되었다.

용대동은 사정리의 제일 위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신라시대부터 이곳을 퉁뱅이라고 불러왔는데 이는 당시 농기구등을 퉁쇠로 제작했던 퉁뱅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 졌다고 전해지며, 1960년대 용대동이라 개명하였다.


용대동은 경기도와 충북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노령산맥의 한줄기인 오갑산(609m)에서 시작한 부용산(644.3m)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으며, 마을 바로 앞동쪽에 「두리봉」과 멀리 남쪽에는 투구봉산(330m)이 감우리와 경계로 길게 펼쳐 있다.

이곳 용대동에 처음 발을 들이신 慶州李氏 조상님은 익재공 이제현(17世) 할아버님의 7세손인 四美亭公李龜의 5세손 운용(雲龍) 할아버님(29世)이 당시 병자호란이 끝난 후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당파싸움의 정변을 피해 며느님인 貞夫人 밀양박씨 할머님 홀로 어린 두 아드님 황곤(黃坤), 후곤(厚坤)을 데리고 충주 단월동에서 전혀 연고가 없던 퉁뱅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당시 부용산 기슭의 큰골 아래의 기슭에 자리잡고 살았지만,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된 시기는 정확히 알수 없다.


그 후 약 300여년에 걸쳐 자손들이 번창하면서 지금의 용대동 위치로 터를 닦아 이전하므로써 慶州李家의 집성촌이 이루게 되어 지금은 8가구가 선영과 고향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250여년전부터 용대동 마을의 풍년 및 문중의 안영과 무운을 빌고자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랫날, 산제당골에서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오늘날 각계각층에서 자손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에는 이곳 용대동에 정착한 이래 숱한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 내셨던 조상님들의 음덕과 보살핌에 힘입은바 크다고 할 수 있다.


□ 사정리 연혁


▲ 사정리는 삼한시대에 온성읍이 있던 오래된 마을이다.

▲ 신라·고려때에는 특수 행정지역이 되어 금촌부곡이라 불렀다.

▲ 조선시대에는 음성현 근서면 지역이 되면서부터 모래물, 즉 모래우물이 있으므로 「모래물」또는 사정(沙井)이라 하였는데, 사정(沙亭)이라 고도 하였으니 이 마을에 머무를 수 있는 숙소가 있어서였다.

음성현 역원중에 역원이 세조때 생겼는데 세조임금이 성주사에 거둥할 때 이곳에 장신원이 생겼다.

▲ 고종 25년(1888) 5월 26일 현감을 폐지하고, 군수가 다스리게 되어 음성군이 되어 한 里가 되다. 그후 고종 32년(1895) 전국적으로 현감이 폐지되고 군수가 다스리다.

▲ 광무10년(1906) 9월 24일 충주땅이던 금왕, 맹동, 대소, 삼성, 생극, 감곡 6개면이 음성군에 편입되어 음성면의 한 里가 되고,

▲ 순종 융희 4년(1910) 경술합방조약 후,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당말, 내촌, 벌대를 병합하여 사정리로 표기하고, 군내면에 편입 되었다.

▲ 1916년 음성에서 장호원간 도로를 3등로로 정하여 도로를 수축하므로 사장산으로 해서 강당말 경유 벌터로 내려오는 길은 산길로 변하고 감우리, 소여리, 신천리로 이어지는 차도가 건설되어 지금의 국도가 되다.

▲ 1956년 군내면이 음성읍으로 변경 승격됨에 따라 음성읍 사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다.

▲ 2005년 1월 1일 현재 고속화 국도가 건설되어 벌터와 본말 사이 동막골에 도로가 건설중에 있어 이 골짜기가 이름대로 동막가 되다.


□ 위치와 가구


사정리는 충북 음성군 음성읍의 한 리로써 면적은 5.53㎢이고, 음성읍에서 북쪽으로 6㎞에 있는데「여지도서」에는 “近西面 沙亭里 自官北距十里”라 기록하다. 서쪽으로는 금왕읍 금석리가있고, 남쪽으로는 음성읍 감우리가, 동쪽으로는 음성읍 용산리와 접하고 있다.

남쪽에서 동쪽을 거쳐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일명 가섭산맥이라 칭하는 산줄기 하나가 서쪽으로 뻗어와 부용산을 만들고, 다시 사정리의 머리라고 칭하는 사장산이 우뚝솟아 있으며, 서쪽으로 문수산과 이어지면서 기름고개를 만들고, 다시 우뚝이 보현산을 만들었다. 사정리에서 보면, 뒤로는 부용산, 앞으로는 문수봉이, 남쪽으로는 보현산이 된다. 임야는 71.272㎡이고, 농경지는 11,090㎡로 전체면적의 17%에 불과하다.


人口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여지도사」에 의하면 당시 음성현 근서면의 사정리였을때는 호적에 편입된 편호가 87戶이고, 남자가 154명, 여자가 252명 계 406명이었다.

2005년 1월 1일 현대 사정1리는 47세대에 남자가 49명, 여자가 61명으로, 계110명이 살고 있으며, 사정2리는 64세대에 남자가 72명, 여자가 80명으로 계 152명이 살고 있다.

도합 111세대에 남자는 121명, 여자는 141명으로 남녀 총인구는 262명이다.


□ 주요 소득원


사정리 주요 농·특산물은 한지, 숱, 구들비, 땔나무, 약초 였으나, 그후 담배, 고추, 인삼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선진농업으로 관상수, 복숭아 등 과수를 하고 있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어 잘사는 마을로 거듭 발전하고 있다.

 

 

<마을탐방/음성읍 사정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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