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 했더니 첫눈 내린지도 꽤 되었다. 창가에 비치는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며 한 가닥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대머리 영감의 심정과도 같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공허함을 나는 이 계절만 되면 어김없이 겪는다. 깨알 가득한 신문지에서는 아지랑이 피어나고 음식을 먹고 나면 으레 이쑤시개를 찾게 되니 어릴 때 지켜보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음도 비로써 깨닫는다.

늙으면 머리가 희어지고 허리가 굽어 지팡이를 짚는 것은 젊은이들이 멀리서 알아보고 미리 조심하라는 뜻이다.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은 골치 아프고 시끄러운 것들을 보고 듣지 말라는 뜻이다. 기억력이 감퇴되어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은 어수선한 세상일들일랑 애시당초 머릿속에 담아두지 말라는 뜻이니 결코 낙심할 일이 아니다. 내가 늙어가야 만이 내 자식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음도 자연의 순리 아니던가. 올 때는 순서에 따라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는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방법들이 이 계절에는 가득하다.

봄에 새싹을 틔우기 위해 나뭇잎을 털며 영양분을 축적하고 있는 식물들처럼 올 한해 나를 겹겹이 쌌던 거푸집을 하나 둘 털어내자. 천년을 살 것처럼 잔뜩 움켜쥐고 죽는 날까지 털지 않으려 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묘지를 이장(移葬)하면서 유골을 정리하다 보면 가난했던 이나 부자였던 이나 겨우 동전 세 닢 입 안에 물고 죽어 있더라. 이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죽는 이들의 얼굴은 밝지 못하나 죽음을 잘 맞이한 이들의 표정은 온화하고 편안해 보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의 보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표현을 쓴다. 불가능을 뜻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무던히도 노력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는 말 일수도 있다. 콩나물을 기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물주기인데, 밑 빠진 독에 콩을 씻어 얹혀 놓고 꾸준히 물을 주다 보면 어느새 영양분이 풍부한 콩나물로 자라난다.
기억력이 쇠진한 노인들이나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물주기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겠지만 반복해서 물을 주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숙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매일매일 금쪽같은 성서말씀을 새겨두고 행동으로 옮겨 보려 하나 돌아서면 잊어버리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물주기가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성령께서 잊었던 것을 채워 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종중 땅 불법 매매로 선친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옥고(獄苦)를 치렀던 집안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나서 K씨의 선친도 세상을 떴다. 묘를 쓸 만한 장소에는 옥고를 치렀던 이들의 묘지가 이미 차지하고 있었고, 정작 선산을 지켜내려 했던 선친은 묘를 쓸 자리가 없어 길옆 나지막한 곳에다 모시었다. 선친의 묘를 쓰고 나서 묘 앞에는 3미터 이상 흙을 돋워 도로를 냈고 옆에는 전원마을이 들어섰다. 그 바람에 선친의 묘는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배수가 잘 안되어 장마에는 물이 고였다.

그 무렵부터 자손들의 꿈에 괴로워하는 선친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난 가을, 수맥에 놓인 선친의 묘를 이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친의 묘지를 이장을 할 곳이 마땅치 않자 하는 수 없이 옥고를 치렀던 이들의 묘지 위에다 쓰게 되었던 것. 이장을 하기에 앞서 각각의 묘지마다 포와 술을 진설한 후, 이 세상에서 풀지 못한 서로의 한(限)들일랑 모두 잊고 저승에서나마 서로 화해하고 평안히 지내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그 후 K씨의 가족들은 선친이 여러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꿈을 몇 차례 꾸게 된다. 며칠을 두고 고심하던 끝에 결국 다른 장소로 다시 이장을 해 드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역시 생전에 풀지 못한 원한은 죽어서도 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급기야 한 달 만에 또 다시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로 선친의 묘를 이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편안해 하는 모습으로 꿈에 나타난 선친의 모습과 가족들에게 연이어 뀐 좋은 꿈들을 통해서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짓게 되었다.

<재미있는수맥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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