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반씨 세거지와 세장지를 중심으로

원남면 광주반씨와 관련된 야산일대
원남면 광주반씨와 관련된 야산일대
 

반기문 차기 유엔 사무총장 탄생과 관련 음성향토사학자 박종대씨가 반차기총장의 출생지인 음성군 원남면 상당 1리 일명 행치마을을 중심으로 한 광주반씨 세거지와 세장지를 중심으로 살펴본 지명 풍수를 본사에 보내왔다.

이에 본보에서는 박종대 향토사학자가 투고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키로 했다.

- 편집자 주-



올 10월25일 “음성신문”에 게재된 차기 반사무총장님의 기사를 읽고 난 돌이켜 생각하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음성(陰城)”에 살고있는 음성인(陰城人)은 한마디도 없이 음성인 아닌 사람들이 “음성” 산천을 말한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잘 아는지, “음성”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행치마을”과 ,광주반씨 세장지인 “해산(海山)”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천명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대로 지켜보는 것이 “음성”을 지키는 陰城人의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남들이 자기것처럼 행세하여 “음성”의 歷史가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그것을 시정하려는 시도도 없다. 아마도 우리가 성씨 근원을 밝힐때, 中華思想의 사대사상에 젖어 억지로 짜맞혀서 漢나라 시절에 어쩌고 저쩌고 하며, 틀에 맞히려는 풍조와 같은 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본다. 저명한 인사, 박사, 교수라는 줄에서야만 세상에 통한다는, 그래야 인정을 받는다는, 허구한 생각에 젖어 소중한 우리것의 밑바탕을 잃어 버리고, 순수성이 망가져 가고 있다.

그래서 지명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문제이므로 지명에 잘못된 곳, 한곳만 대표적으로 논해볼까 한다.



□ 잣고개에 대한 인식



음성 “향교말”에서 “한벌리”마을로 가려면 향교 앞으로 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을 가다보면 고개마루를 넘어야 “한벌리”로 들어 가는데, 이 고개를 음성 쪽에서는 “한벌리고개”라 불렀고, “한벌리”쪽에서는 음성장을 보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장고개”라 불렀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아닌 순수한 우리말로 “잣고개”라 이름하였다. 그래서 “음성읍지”같은 사적에 “잣고개”라하니까 이곳에 잣나무가 많은줄 알고 잣백 자를 써서 “백현(栢峴)”이라 이름 붙였다.



이름을 지을때는 그래도 유식한 사람이 작명하는 것은 고금의 통례인데, 그 사람이 음성인이었다면, 이렇게 허망한 거짓 이름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옛 말(고어)로 “성(城)”을 “잣”이라 하였던 것이다. 즉, “城이 있는 고개”를 “잣고개」라 하였다. “옥녀봉”에서 “수정산”으로 연결된 이 고개는 우리가 지금“수정산성”이라 부르는 산성이 있기에 “잣고개”라 이름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이 오기(誤記)를 오느날까지도 사적(史籍)에 오르내리는 지명(地名)이라 하여 아무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말의 순수성과 그 근원을 찾지 못한채 사대주의 같은 인식을 털어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따른 허구사상은 진실을 버리고 말아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 병폐에 빠지고 말았다. 뭐라 말하면, 뭘 안다고 아는척 하는가, 배우지도 못한게, 전공도 없이 등의 식으로 깔보는 태도는 “음성”을 병들게 하였고, 잃어 버리게 하였고, 후퇴하는 행위가 되어서 우리 자신들이 이제는 깨닮아야 할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음성”은 예부터 “충주”에 붙은 땅이 되어서 모든 것을 “충주”에서 찾아와 제자리에 두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중한 자료를 충주인이 쉽게 주지 않는다. 얻으려 하지말고 모르면 공부하고 연구하여 스스로 찾아내고 정리해야지 남이 내 것을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 반기문 총장은 음성인



요사이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반기문장관(潘基文長官)이 확정되면서 “음성”과 “충주”에 많은 프랑카드를 내걸고 환영하고 있다. 정령 축하하고 영광의 자리에 오른 그 분을 우리 음성군민은 진정 떠 받들어야 한다.



예부터 그 고장 인물이라면, 통상적으로 그 고장에서 출생하였거나, 살았거나, 죽어서 묘소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분이 태어난 곳이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이니까 음성출신이므로 음성군민이 환영하고 축하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런데 충주에 붙은 프랑카드를 보면, “충주인이 세계 대통령이 되다”라는 문구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환경이 더 좋은 곳으로 가서 공부하기 위하여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충주에서 공부한 것을 가지고 충주사람이라 말하기 보다는 충주동문이라 하였다면 좋지 않았을까. 요사이는 공부하기 위하여 대도시에 머무는 실정이 아닌가 말이다. 어쨌던 음성인으로서는 자랑스런 일이다.



□ 음성지명과 광주반씨



음성지명(陰城地名)과 광주반씨 세거지(光州潘氏世居地)와 세장지(世葬地)에 얽힌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음성읍(陰城邑)에는 몇군데의 명당 땅이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때 명나라 이여송장군이 음성산하를 두루보고, 인재가 태어날 것을 두려워 하여 쇠말뚝을 꽂아 지혈(地血)을 막은 “음성4대명당처”의 한 곳이다. 그곳이 향교 뒷산인 “옥녀봉”이다.

또 한곳은 보현산(普賢山)인데, “萬生山下 可活萬人之地”의 명당이다.



세상이 어수선하면 풍수가들이 만생산의 명당을 찾기 위하여 곧잘 헤매는 곳이다. 만생산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수 있는 넓은 땅이 어디일까?

“옥녀봉”처럼 한 곳에 정해진 명당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땅! 만인이 복받는 땅! 그래서 음성을 축복의 땅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명당의 땅을 고구려때에는 관들(관평=官坪)이라 하였고, 바다같이 넓다 하여 “바다미”라 불렀으며, 또 “해평(海坪)”이라 하였고, 그 해평을 바라보는 산을 “해산(海山)”이라 불러 왔으며, 그 해산을 “왕재산(王峴)”이라고도 하였고, 그 왕재산을 돌아 길이 나 있어 “능모롱이”라 이름 하였으며, 그 옆 마을을 “능촌(陵村)”이라 이름 붙여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능”이란 옛날에는 王 외에는 붙이지 못한 말이다. 특히 왕이 있다는 “왕재산”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이름화 된것에는 크게 세가지로 구분한다.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이 그것이다. 이미 이름화 되어버린 과거형, 지금 이름처럼 진행되고 있는 현재형, 이름처럼 되기를 바라는 미래형들이 있다.



여기서 잠깐 이미 이름화된 현재형의 지명 하나를 예를 들어볼까 한다. “잣고개」넘어 비산리에 군부대가 있는데, 군부대가 있는 산을 “불산(火山)”이라 불러왔다. 왜! “화산”이라 이름이 되었는가 하면,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 음성땅이 고구려였을 때, 고구려에서는 음성땅을 “잉홀(仍忽)”이라 이름하였다. “잉홀”이란 “봉화(烽火)”의 뜻이다. 그래서 “봉화골”이란 이름이 남아 있는데, 이 잉홀의 이름이 신라땅이 되면서, 홀(忽)자가 변하여 “火, 伐, 弗”로 변칭되었음은 안정복이“동사강목”에 이미 말한바 있다. 그 근거로 “가섭산”을 중심으로 주변의 이름들 속에서 “목벌”,“광벌”,“한벌”을 비롯하여 “화산”이란 이름들이 있음을 알수있다. 지금 군부대가 있는 “화산”에는 화약고를 설치하였다. 우리말로 하면, 이름대로 “불산”이 되었으니 이름화 되어, 현재 진행형 이름이 아닌가. 뉘가 “불산”이 될 것을 알았으리.



또, 과거형이 된 이름 한곳을 보면, 소이면 충도1리와 2리 사이에 있는 “충도저수지”가 있는 골짜기 원 이름은 “한 움볍이었다. 이곳에 일제시대 저수지가 생겨 이름대로 “한 움볍이 된것이니, 이것이 이미 이름대로 진행돼 버린 과거형이 된것이다. 음성 주변에는 이름대로 된 곳이 이뿐만 아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름화된 지명속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천지조화(天地造化)에 경악을 금치못한다.



“왕이 있는산(왕재산)”,“능(임금,왕후의 묘)이 있는 마을(능촌)”, “능을 돌아가는 곳(능모랭이)” 이라는 이 “해산”의 의미는 크다 하겠다.

이미 점지된 곳인데, 그 땅을 “광주반씨 세장지(光州潘氏世葬地)”로 삼아서 그네들의 소유가 되었다. 처음에 이곳의 주인이 된 사람은 광주반씨에서 음성에 최초로 살기시작한 사람으로 영춘현감을 지낸 반석권(潘碩權)이 명종15년(1560)에 이곳에 처음 묻혔으니, 지금으로부터 447년의 일이다.



□ 음성은 인재의 요람



과거에 왕이 낳지 않았다면 현재가 될 수 있고,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옛날에는 왕, 지금은 대통령이라 한다. UN사무총장은 국가원수의 대우를 받는 자리이므로 대통령에 버금가는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반기문(潘基文) 차기 UN사무총장님은 세계대통령이라 칭하는 자리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준비된 선조(先祖)들의 세거지(世居地), 세장지(世葬地)의 명당에서 출발하여 연연히 이어온 복지(福地)의 땅에서 음덕(蔭德)의 기(氣)를 받아 싹이터서 기필코 달성에 완주한 자아세상(自我世上)을 만든 것은 차근차근 노력해온 남보다 특별난 사고력으로 최선을 다한 후손에게 그만한 댓가가 주어진 “왕재산(王峴)”의 주인이요, “능모롱이”의 주인이며, “능촌(陵村)”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하여 “왕재산”의 주인임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다.



예부터 음성은 인재가 태어나는 복지의 땅이라 하였고, 음성은 축복의 땅이라 하였다. 지운(地運)이 깃들인 곳엔 인물이 태어낳기 마련이다.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인 류성원(柳誠源)은 조촌(助村) “초당골”에서 태어낳고, 풍운아, 기린아로 칭하며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물은 말먹여 없앤다는 거대한 포부를 지녔던 남이장군(南怡將軍)은 원통한 혼이 깃든 원통산 줄기 잔자골 “조문터”에서 태어낳고, 육전충무공(陸戰忠武公)이라 칭하는 이수일장군(李守一將軍)과, 청인이 임경업보다 더 무서워했던 무부정승 이완대장(李浣大將)은 이수일장군의 아들로 부자가 “영산골”정기받아 태어낳고, 한 시대를 주름잡고도 간신멍애를 쓴 이이첨은 마이산 “동리(東里)”태생 이었으며, 효종임금에게 병법(兵法)을 가르쳐 북벌정책을 세우게했던 스승 채득기(蔡得沂)는 천여권의 책을 탐독하여 앞날을 내다보았던 인물이 원남 삼용리 “물언덕”에서 태어나 살았나하면, 그 외 수많은 인물이 “음성골”에서 나왔다.


<기획/향토사학자 박종대씨가 본 지명풍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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