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경북 의성에 사는 남편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하는 내용을 들어 본 즉, 그가 의성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의성! 긴 시간을 운전해야 할 남편에 대한 염려는 뒤로하고, 나는 그 고장의 향기를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처음’이란 글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진 않지만 ‘처음으로 가는 곳’하면 마음 씀이 달라진다. 이럴 때에는 처음 뒤에 느낌표를 찍는다. 학창 시절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완도에서 배를 타기 위해 호남으로 내려가던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고향을 떠나보지 못한 나는 ‘아!’하고 탄성을 발했다.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우리 동네의 논에 비해 남도의 평야는 네모진 문양을 가지런히 새긴 초콜릿과 같았고, 구릉지는 산에서 느껴지는 웅장함과는 달리 온화함과 여유가 있었다. 여행의 맛을 알게 된 뒤로, 나는 처음 가는 곳이 있으면 설렘과 동경을 담아 느낌표를 찍어 두는 남모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의성으로 향했다. 음성에서 충주까지의 길은 자주 다니던 길이라 아침에 먹은 국을 점심과 저녁에도 먹는 것처럼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가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충주 나들목에 들어서서야 콧등으로 내려간 안경을 치올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자연을 가슴에 안기란 쉽지가 않다. 차가 문경을 지날 때 과거 길에 오른 유생들로 넘쳤을 새재는 어디쯤일까 생각하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잘 닦여진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었다. 문경을 지나 상주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다.


국도를 타고 의성으로 가는 길은 차들의 통행이 드문 이차선이다. 좀 지나니 ‘낙동면’이란 이정표가 나왔다. 낙동! 혹시 낙동강을 볼 수 있을까하며 차의 등받이를 세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를 만났다.


산 아래의 절벽과 강가의 모래밭을 사이에 두고 강물은 흘렀다. 가을바람에 강가 모래밭의 갈대숲이 일렁였다. 강물이 굽어 흐르는 곳에는 ‘관수루’라는 누각이 있었다. 옛 영남의 선비들은 관수루에 올라 녹수청산에게 자신이 지은 시조를 읊어주며 풍류를 노래했겠지. 악공이 찾아 온 운 좋은 밤이면 강물은 가야금의 떨림과 단소 가락의 여운을 들으며 세월을 안고 흘렀겠구나. 강을 따라 나있는 길 덕에 나는 잠시나마 낙동강의 가을을 보며 짧은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강을 뒤로 하고 접어 든 시골길에서 내 마음을 읽은 남편이 차의 속도를 줄였다. 입동을 맞은지 며칠이 지났건만 가을걷이를 못한 논의 벼가 허리춤까지 휘여 져 있었다. 그리고 전설을 담고 있음직한 비(碑)를 지나쳤다. 얼마안가 앞의 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비가 또 나왔고, 작은 비각도 있었다. 남편이 차를 멈췄다. 지붕을 받친 기둥과 기둥 사이를 홍살로 막았고 그 안에 비를 봉안했다. 비각의 현판을 보니 ‘권씨 부인 표열각(表烈閣)’이란다.


표열각이라, 열려문을 말함인가. 한(恨)을 가슴에 안고 사라졌을 여인을 생각하니 애잔함이 밀려왔다. 큰 물줄기가 가까이 있는 탓인지 갈대가 자주 눈에 들어왔다. 길섶의 갈대를 보며 낙동강 강가의 갈대숲이 생각났고, 표열각의 주인을 떠올렸다.  옛날에 어느 부인이 부군(夫君)을 먼저 잃었을꼬. 임을 따라나서게 만든 정(情)의 애틋함을 생각하며, 나는 비각의 부인에게로 빠져들었다.


낙동강의 갈대숲이 바람에 일렁임은 혹시 부인이 바람을 타고 전하는 눈물이 아닐까.

‘갈대는 강물과 벗하여 한 시절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강물은 야속하게만 흐리고 뿌리가 땅에 박힌 몸이라 잡을 수도 없습니다. 나도 갈대와 같은 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몽롱한 외침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 했다. 우리 부부가 서 있는 길에 바람이 불어왔다. 십일월의 바람에 머릿속이 시원해지며 정신이 맑아졌다.

아뿔사! 내가 가을날 단상에 빠져 지조가 굳은 부인을 갈대에 견주고 말았구나.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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