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


고즈넉한 외딴마을. 새들이 분분(芬芬)히 날고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봄을 방불케 한다.

씀바귀무침과 냉이된장국으로 걸게 때운 한끼 식사가 탈이났나보다. 속이 더부룩하다.


속아리도 속아리려니와 정신적으로 소통되지 못한 통증역시 같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털어내야 할 언어를 털지 못하고 간직해야 하는 돌덩이 같은 것, 이순의 고갯마루에서 잠궜던 단추를 하나 하나 풀어보고자 한다.


초등학교와 인접한 우리동네에는 언제나 선생님이 살고계셨다.

같은 동네에 사시던 선생님이 담임인 관계로 심부름은 늘 내 몫이었다. 6학년 겨울방학때 일이다.


저녁을 일찍먹고 ×××와 선생님 댁으로 오라고 했다. ‘채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저 많은 시험지 얼마나 오래도록 모아놓은 것일까? 선생님의 게으름이 눈에 보였다.’, 등잔불 밑에서 채점은 계속이어지고 자정이 넘으면서 졸음과 싸워야 했다. 졸음을 쫓기위해 환기는 물론 찬물을 마셔보아도 그때뿐 졸음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졸음이란 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수록 더 큰 늪으로 빠져드는 수렁이었다.

꾸벅 졸면서 거의 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개학이 되어 학교에 갔다.


그동안 채점한 시험지를 나누어주고 성적 등수까지 불러주시는 선생님, 모두가 침묵인데 그 침묵을 깨트리는 울분에 찬 목소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채점을 다시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자기의 시험지 채점한 것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이것도 맞았는데 가위를 쳤고, 저것도 그렇고, 이게 누가 채점한 것이냐고 따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웅성웅성 거렸다.


선생님은 성적표까지 다 작성되었으며 일주일안에 졸업할 예정이라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랐다.

나는 겁이났다. 졸면서 채점을 했으니 잘 할리 없고 하필이면 그 친구의 시험지가 엉망으로 채점이 되다니, 함께 채점한 친구는 겁이난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눈물이 뒤범벅이된 그 친구의 원망과 하소연을 뒤로한채 졸업을 했다.


그때 옥죄이는 내 마음은 참담하기만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졸음이 빚어낸 일.

그 친구의 이름은 유진숙이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었으며, 단정하고 똑똑하고 야무진 친구였다. 그러한 그가 6학년 성적표를 볼때마다 얼마나 속상해 했을까! 그 친구는 졸업이후에 동창회 모임에서 얼굴을 본적이 한번도 없다. 소식을 아는 친구도 없다. 그 친구의 화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겠다 싶어 공개사과를 한다.

미안하다. 진숙아. 선생님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컷으며 감수성이 예민한 그때 일을 지울수 없는 상처가 아닐지.

진공포장된 통조림 뚜껑을 연것처럼 나의 기억의 그림은 곰삭아 있지만 네마음 맨 밑바닥에 모래를 품은 조개처럼 얼마나 아리었을까?


그때 그 선생님은 하늘나라로 이사하신지 퍽 오래 되었고 모두가 수면위에 뜬 부표로 내 기억속에 존재할뿐 어느 한 분의 직무유기가 큰 바위 서렁을 이루고 바위산에 새겨진 서각 미안하다. 미안했다. 빚진마음이 이럴까? 해마다 12월이 되면 되돌리고 싶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이제는 지울수 있을까? 그 친구를 만나 사과하지 않으면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석양이 지고 하늘을 날던 새들도 울숲으로 깃들었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묵은 먹지를 털어낸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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