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명화

농사일의 갈무리가 거의 끝나 간다. 김장을 하고 메주 쑤면 시골 노인들은 방학이 되고 병원은 환자가 늘어난다. 요사이 2~3일에 한 번씩 오시는 젊은 할머니가 있다. 우리 간호사들은 60대 노인 분들은 젊은 할아버지 할머니고, 70대가 넘으시면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른다.

그 젊은 할머니가 주사실에서 “내가 어제 오는 날 인데 왜 못 온줄 알아?”하신다. 나는 대답대신 “왜 못 오셨어요?” 하고 되물었다. 사연인즉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내복을 입었는데 웃옷은 외투까지 입고 아래는 내복 바람으로 버스 승강장까지 나왔다가 동네 할머니가 알려줘서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어찌나 야단을 치던지 속상해서 안 왔다고 한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자니 문득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어제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니 비릿하고 구수한 냄새가 따스한 온기와 함께 나를 반긴다. 어머니한테 무슨 냄새냐고 물으니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갈치조림을 해 놨다고 하셨다. 아침잠이 많은 며느리를 위해서 쌀을 씻어 놓고 국이나 찌개를 미리 끊여 놓으신다. 아침상에 올리려고 접시에 담는데 냄비 바닥에 무가 눌어붙어서 잘 떠지지가 않는다. 놀래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무가 아니라 플라스틱 양념 통 뚜껑이 열에 녹아 일그러진 채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과 어머님이 식탁에 앉아 계신데 그것을 들고 이것이 왜 여기에 있냐고 하니까 어머니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제 뚜껑을 그렇게 찾았는데 그기에 들어 간 줄 몰랐구나.” 하신다. 요즈음 플라스틱 그릇이 환경호르몬 때문에 유리나 다른 것으로 바뀌어 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에 한참을 열을 가했으니 오죽 할까 싶어 나는 갈치조림에 손이 가지 않았다. 밥상을 대충 치우고 서둘러 출근을 했다.

오전에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옷을 안 챙겨 입고 밖에 나온 노인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건망증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닌가. 치매 증세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쉬운 대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건망증은 주의력이 산만하거나 신체적인 피로 및 우울감, 그리고 비사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교제가 부족해지면 생길 수 있고, 심혈관 질환이나 당뇨병, 빈혈 등의 질환을 앓아도 생길 수가 있다고 한다. 치매는 영원히 무엇 인가를 잊어버린 증상. 누가 잊어버린 것을 말해 주더라도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뇌가 각종 외상이나 질병 등으로 손상 또는 파괴 되었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할머니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칠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서울로 공부하러 간 오빠들에게 밥을 해주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어느 날 시장 보러 나가셨다가 기억의 끈이 끊어져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오빠들이 백방으로 찾다가 결국 파출소에서 모시고 왔었다. 그길로 시골로 내려오셔서 3년 가까이 그렇게 사셨던 것 같다. 막내 손녀인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벽 장속에 놓고 아끼던 꿀을 한 숟가락씩 떠 주시던 인자한 얼굴의 할머니가 더 이상 아니었다. 그때 힘들고 지쳐보이던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전에 어머님은 혈압과 당뇨병은 있었지만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실천 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셨다. 그래서 건강하고 친구 분들이 많으셨다. 아침에 노인정에 나가면 저녁 때 쯤 돼서야 집에 들어오신다. 그런데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는 노인정을 운영 하지 않아서 혼자 저수지 가는 길로, 아파트 뒷산으로 운동을 다니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닭장 같은 아파트에 갇혀서 친구 없이 지내는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가늠이 된다. 아침 식사 때마다 앞집에는 사람 드나드는 걸 못 보겠다느니 옆집 아저씨는 말 좀 해보려고 했더니 그냥 들어 가버린다느니 하는 말을 매일 하셨다. 우리는 바쁜 아침시간이라서 어머니가 하시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아파트 생활이 원래 사생활이 철저히 보장된 곳인데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시라고 했다. 그러나 전처럼 씩씩 하지도 않고 여기 저기 아프다고 하신다. 일시적인 건망증 증세인 것이 확실하다. 치매를 잠시 의심 했을 때, 힘들었던 엄마 얼굴이 생각 난 것은 내가 겪게 될 상황을 염려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이기적인데 어머니는 주시기만 한다.

내일부터 아침식사 시간을 조금 더 늘려 어머니랑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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