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조용호,새마을 지도자 정연승,노인회장 우병현,부녀회장 강호순,총무 이용희,반장 김춘식,김움전,유강옥,이희정

□ 무릉도원

 

도심지의 쾌쾌한 매연속에서 찌들었다가 이 마을에 와보고는 그누가 다시 도심지로 돌아가고 싶으랴!

마이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이 마을 한가운데로 관통하여 사계절 물소리가 들리고 물고기가 노닐어 마을인지 휴양지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온통 꽃길이요! 마을전체에서 풍기는 허브 향기가 너무 진해 마치 무릉도원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 마이산을 뒤로하고 풍수좋은 양덕1리

 

천하명산으로 불리는 마이산을 뒤로하여 예로부터 풍수가 좋고 토질이 비옥하여 농업을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는 순박하고 인심 좋은 삼성면 양덕 1리.

삼성면 양덕 1리는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이고, 대사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로 가구수는 102세대로 공기가 맑고 아름다운 동네이다.

본래 충주군 지내면 지역인데 고종 광무 10년 음성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교동, 양곡리, 대사동리를 병합해 양곡의 "양"자와 덕교의 "덕"자를 따서 양덕리라 하고 삼성면에 편입되었다. 양덕1리는 마이산이 둘러쌓 여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로 마이산 정기를 받아 내려 흐르는 물은 주민들의 심성으로 마음에 새겨져있다.

 

□ 부부 미륵(돌미륵)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에 있는 미륵을 남미륵이라고 하고, 동쪽에 있는 미륵을 여미륵 이라고 한다. 이 두미륵은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세워진 이유나 연대는 미상으로 보인다. 과거에 수차 이 미륵들을 땅에 묻었는데 이유없이 변고가 생겨 다시 캐내 세웠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이 미륵들을 묻으면 미륵이 위치하고 있는 마을은 부유해 진다하고 반면 후면에 위치한 마을은 미친 사람이 많이 생기는 등 변고가 생겼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 미륵을 다시 캐내 세웠다고 한다. 이 미륵 옆을 지나다가 돌을 던져 단번에 코를 맞으면 재수가 대통한다하여 많은 사람이 돌을 던지고 지나가기 때문에 이 미륵부근에 전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돌 사태로 늘 고심을 한다고 한다.

 

□ 마이산

 

차령산맥의 줄기로 마이산(일명 망이산)이라 불리우며 해발 4백 72m로 삼성면 양덕리와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화봉리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산정에는 봉수대와 망이산성이 있으며 산아래 마을인 동리는 조선 광해조 때 권신, 이이첨이 출생한 곳이다. 인조반정으로 이곳을 기지로 삼아 싸우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고 조선 14대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마을은 왜병의 진지로도 사용되었으며, 현 경기도 일죽면 조기산의 아군과 대치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 마이산 봉수대

 

마이산 봉수대는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가르는 도계가 되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다. 봉은 횃불, 수는 연기를 말하며 급보를 전하던 고대의 통신방법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던 것인데 동양에서는 물론 서양의 고대 사회 및 미개사회에서 널리 사용됐다. 망이산 봉수대는 동으로 음성 가엽산, 남쪽은 진천 소을산, 서쪽은 죽산 건지산이라 하여 중부내륙지방에서 올라오는 봉수를 종합해 서울에 목면산(남산)으로 올리는 주요한 역할을 한 곳이었고 산능선을 따라 3km 주위에 성곽이 있고 산성 주변에는 평양의 토성리에서 출토되는 기와와 문양이 발견되어 한강 이남을 지배할당시 고구려의 남진 기지로 추정되고 있다.

 

□ 담안밭

 

삼성면 양덕1리(동리)마을에는 담안밭이라는 8백여평의 남짓한 밭이 자연석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있다.

이 밭은 이조때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이이첨의 어린 시절 태어나고 자란 집터 안의밭이라고 한다.

이이첨은(명종5년~인조1년)나이 35세때 문과에 급제해 출세의 길을 달리다가 이조정란 때 선조임금이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이 대립하게 되자 대북파의 우두머리로서 광해군 웅립을 주장하고 정인홍과 모의해 영창대군을 받드는 유경영등 소북파를 논박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1608(선조41년)에 선조임금이 승하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일약 예조판서가 되고 대제학을 겸하게 되니 그 권력과 세도가 일신에 모아졌다.

이에 조선팔도의 지방수령들이 앞을 다투어 예물을 보내는데 삼남일대의 붕물짐은 이곳 양덕리 이이첨의 집앞 밭에 봉물짐을 쌓아놓고 돌로 담을 둘러쳐 있던 자리가 지금도 남아있어 지금 사람들이 담안밭이라고 하고 있다.

양덕리 주민들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어려울 때 돕고 협력하며 전통은 마이산의 자태만큼이나 중후하고 이곳에서 자란 자식은 부모와 어른에게 극진히 효로서 봉양, 어느 곳에 가서 살던 성실과 근면으로 삶의 근본을 교육하고 있다.양덕1리는 고추, 인삼, 파로 농가소득을 올리면서 주민이 날로 증가하며 전원주택 마을로 발전하고 있다.

<취재/박명식 기자, 권혁모 명예기자>

<마을탐방 / 삼성면 양덕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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