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중국에서는 수탉이 정원에서 암탉과 있는 모습을 보면 전원생활의 기쁨을 나타낸다고한다.

 

그러고 보니 마당으로 정원으로 암탉과 새끼들을 거느리고 유유자적하며 거닐고 있는 우리집 수탉이 딱 그 짝이다.

 

지금은 암탉과 새끼 닭을 합해 일곱마리 밖에 없지만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암탉을 12마리나 거느렸던 위풍당당의 지아비였다.

수탉은 크고 힘이 세 성질도 포악하고 왠만한 강아지나 고양이도 그 주위를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우리들 상식이다.

하지만 이제껏 우리집 수탉이 목에 있는 갈기를 세우고 발톱을 세웠던 적은 지난 해 기존 있던 수탉과의 싸움뿐이었다.

토종닭의 구별은 발목의 색깔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기존 있던 수탉의 발목은 황색에 가깝지만 나중 들어온 지금의 닭의 발목은 푸른빛을 띄는 검은색의 발목을 하고 있다.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푸른색이 도는 검은 발목을 하고 있는 것이 토종닭이라하여 지인이 기르라며 가져다주었다.

헌데 이 두 녀석이 서로를 보자마자 갈기를 세우고 발톱을 세우더니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두 수탉은 서로의 벼슬과 목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혀 만신창이가 되어 피가 흐르는데도 멈추려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린 기존에 있던 발목이 황색인 수탉을 잡아 지인에게 몸보신하라며 내 주었다.

헌데 이 수탉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암탉과 함께 부부가 왔다.

닭들의 세계만큼 텃새가 심한 짐승들도 없다는 것도 이때 알게 되었다.

기존 있던 암탉들은 모이를 먹을 때는 물론이고 잠을 잘 때도 새로 온 암탉을 연신 쪼아대는 통에 토실토실하던 엉덩이 털이며 날개 죽지 털이며 여기저기 들쑥날쑥 빠진 것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헌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수탉은 이런 암탉에게 어떠한 배려도 없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기존 암탉들의 수탉을 향한 구애는 극치를 달하고 있었다.

그때는 수탉이 암탉들을 외면해 줬으면 하는 바람에 수탉이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 한 무리의 구성원으로 잘 어울리고 있는 새로 들어온 암탉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수탉은 그렇게 지켜봐주는 것이 새로 들어온 암탉이 살아 갈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지금도 가끔씩 고약한 암탉들에게 쪼이기도 하지만 모이도 잘 챙겨서 먹고 가끔은 수탉 옆에서 잠을 자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우리 사는 모습도 닭들의 세계와 뭐가 다를까.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에 내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조화될 수 있도록,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지독한 관조자가 되어주어야  할 지도 모른다.

메마른 사막의 꽃이 아름다운 것이 그런 이유이고, 태양의 뜨거운 불을 먹고 자란 과실이 유독 단 맛을 내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피나는 노력과 많은 실패로 얻은 소중한 성공의 결실이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멀리서 수탉의 구구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정원 한켠 개나리나무 밑에서 먹이를 찾던 암탉들이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궁둥이를 흔들며 앞 다투어 뛰어가고 있다.

그 뒤로 들쑥날쑥 털이 빠져 있는 암탉 한마리가 뒤질세라 연신 궁둥이를 흔들며 뛰어 간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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