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이곳은 나의 환상의 일터이다. 일이 많지 않고, 남는 시간은 충분히 사적인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자리이다. 일이 없는 시간에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봄에는 대학의 평생교육원에 입학하여 자격증도 땄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제출해야 할 과제물이 많았다. 과제를 사무실에서 다 했으니, 공부를 취미로 삼고 싶은 내게 직장은 말 그대로 환상인 것이다.

사무실 직원은 나까지 네 명이다. 세 명은 나의 상사이고 남자다. 성별의 차이인지, 계급의 차이인지 모르지만 이들과는 업무를 떠나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대화가 없으니 세 남자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딸을 둔 M은 부인에게 무 자르듯 툭툭하게 말하지만 애처가라는 것과, K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풍족하며, 서른 중반을 넘긴 노총각 L은 과수원집의 장남이라는 정도이다.

그동안 생활하며 알게 된 이들의 공통점도 있다. 셋은 말을 줄여서 사용하는 것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줄임말의 발음은 육담에 가까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인상을 쓰기에 충분하다. 나도 처음 이들의 줄임말을 들었을 때 인상을 썼다. 전화를 하다가 수화기를 쾅 내려놓으며 던지는 두 글자 ‘씨X’와 흥분해서 말하는 세 글자 ‘조XX’를 들을 때마다 ‘환상의 일터’에 금이 쩍쩍 가는 것 같았다.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볼 주변머리가 없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다 두어 달 쯤 지났을 때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들만의 언어구사법을 터득한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언어를 내 멋대로 풀이하고 ‘세 남자의 암호’라 명명해버린 일이지만... 두 글자는 ‘씨앗이 발아하다’를 단어의 첫 자만 따서 쓰는 말로, 세 글자는 ‘좋아 졌네’에서 ‘ㅎ’과 ‘아’가 탈락한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그 뒤로 나는 줄임말을 들을 때마다 ‘씨앗이 발아 하네’ ‘좋아 졌네, 좋아 졌어’ 하며 속으로 말을 길게 늘여 놓는 버릇이 생겼다. 더 이상 나의 일터에 금이 가는 착각은 들지 않았다.

직장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서류를 정리하는 간단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 있을 때 보다 퇴근 하고 집안일을 할 때가 더 바쁘다. 집으로 돌아오면 서둘러 저녁을 준비한다. 준비하는 내내 시간에 쫓겨 정신을 못 차리다가 상을 물리고 나면, 그제야 한 숨 돌리며 남편과 차를 마신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마시는 차는 여유로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 올린다. 내 몸이 가뿟해져 찻잔에 피어오르는 김처럼 하늘로 올라간다. 실로 차 한 잔에 지나친 상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날도 저녁상을 물리고 남편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다. 두 모금 마시고 내 몸이 하늘로 피어오르는 꿈에 빠졌다. 그런데 세 모금 마셨을 때 하늘에서 뚝 떨어져 버렸다. 승천하던 이무기가 떨어져 버린 것처럼, 남편이 던진 한 마디에 곤두박질쳤다고나 할까. 내 귀를 의심했다. ‘세 남자의 암호를 남편이 쓸 리가 없지’하며 반신반의하고 물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조 X X”

남편이 말한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나는 사무실에서 하던 버릇대로 속으로 길게 늘여 놨다. ‘이 사람이 어떻게 그 암호를 알고 있을까’ 다시 한 번 물어봤다. 같은 질문이었지만 억양은 전과 달랐다. 나의 물음에 남편은 방금 전과같이 세 글자 암호로 대답했다. 사무실에서는 괜찮았는데 집에서 암호를 들으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마도 뜨거워졌다.

남편은 이상하다는 듯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신문을 내밀었다. 남편이 보던 신문에는 소설가 조정래 선생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남편은 기사를 읽고 ‘조 정 래!’ 감탄을 하였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더니, 들은 만큼 듣는다는 것을 느낀 밤이었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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