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남

  장마철이라고는 하지만 비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렵다.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날이 계속되면서 비를 기다리는 농심은 이래저래 타들어간다.

한 여름 날씨 인지라 낮의 더위는 어쩔 수 없다지만 밤에도 여전히 식지 않는 열기로 인해 단잠을 설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오늘밤에도 단잠을 이루는 건 애당초 포기해야 할 듯싶다.

창문을 열어 놓아도, 선풍기를 돌려봐도 더운 바람만 얼굴에 와 닿는다.

괜스레 짜증 섞인 동작으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면서 뒤척거리는데, 문득 내 어릴 적 여름밤이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와 멈춘다.

대가족이었던 우리 집은 여름날 저녁이면 늘상 마당에서 저녁을 먹었었다.

마당 가운데에 큰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리쌀에 강낭콩이 듬성듬성 섞인 잡곡밥.

반찬이라야 문 앞밭에서 따온 가지, 오이, 풋고추, 호박, 그리고 호박잎을 쪄서 된장찌개에 적셔서 양념간장을 얹고 싸 먹는 게 고작이었는데 뭐가 그리 맛있고, 즐겁고, 행복했는지...

아마도 우리들 웃음소리 때문에 우리 집 뒷산에 자리 잡은 새들은 밤잠을 설쳤을지도 모른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도 우리 자매들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멍석에 누워서 이런 저런 얘기꽃을 피우곤 했다.

밤하늘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별들도 우리 얘기를 훔쳐 듣고 함께 웃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선풍기와 냉장고도 없던 시절, 그렇게 자연바람이 좋아서 하늘을 마주하고 누워있다 보면 설거지를 마친 어머니와 언니는 개복숭아를 한 바구니 씻어서 가지고 나온다. 어느 날은 옥수수, 고구마, 감자......

개복숭아는 반으로 자르면 씨만 남고 잘 갈라진다.

개복숭아는 달밤에 먹어야 한다는 말에 왜일까 궁금했는데 이유인즉, 그래야 벌레 먹은 게 보이지 않아서 벌레까지 먹기 때문이란다.

복숭아벌레는 먹으면 예뻐진다나. 여름이면 그렇게 멍석위에서 밥 먹고 야식 먹고 뒹굴면서 추억을 만들었고, 더위도 이겼었다.

들어가 잠들 자라고 성화를 내시는 어머니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갈 때쯤이면 마당가에 피워둔 모깃불도 사그러 들고, 밤하늘의 별들도 잠이 든 것 같았다.

이 밤, 그 옛날, 그 마당과 멍석, 모깃불이 한없이 그립다.

지천명을 넘긴 언니들, 불혹을 앞에 둔 동생들은 이 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옛날에 금잔듸 동산에 메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 내 사랑하던 메기야」

문득 이 노래가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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