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적의 창끝을 꺾는다는 뜻으로, 평화로운 교섭으로 일을 유리하게 담판짓거나 흥정함을 이르는 말.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제(齊)나라의 장공(莊公)이 최저에게 시해(弑害)당하자, 경공(景公)이 그 뒤를 이었다.

경공은 최저를 좌상(左相)에 봉하며, 최저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모든 신하에게 강요(强要)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 안영만이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歎息)하기를 “임금에 충(忠)이 되고, 나라에 이(利)가 되면 따르겠노라” 하였다.

그 뒤 최저가 피살(被殺)되는 정변(政變)이 일어나 안영이 국정을 맡게 되었는데, 이가 곧 춘추시대의 명재상 안상국(晏相國)이다.

그는 한 벌의 호구(여우털옷)로 30년을 입을 정도의 검소한 청백리(淸白吏)였다.

한번은 경공이 그에게 큰 식읍(食邑 : 나라에서 공신(功臣) 등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을 하사하려 하자, “욕심이 충족(充足)되면 망할 날이 가까워진다”고 하며 사양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중국은 12개의 대국(大國)을 비롯해 다른 소국(小國)을 다 합쳐 100개국이 넘는 나라가 각축(角逐)을 벌였다.

안영은 이들을 상대로 외교(外交)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사람들은 안영이 제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외교 수완에 대한 언행을 기록한 것이 바로 『안자춘추(晏子春秋)』이다.

여기서 안영을 두고 평하기를 “술통과 도마 사이를 나가지 아니하고 천리 밖에서 절충한다 함은, 안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한번은 안영이 경공과 함께 강국인 진(晉)나라에 갔다.

여흥(餘興)으로 투호(投壺)를 하게 되었는데, 진나라의 신하가 “만일 우리 주상(主上)이 맞히면 제후의 주장이 될 징조다” 하였는데, 말대로 진나라의 평공이 맞혔다.

이번에는 안영이 나서서 “만약 우리 주군(主君)이 맞히면 제나라는 진나라를 대신하여 흥할 것이다”하였다.

그리곤 경공도 맞히자 진나라 평공의 노기(怒氣)가 발하였다.

그러자 안영은 “투호는 오락(娛樂)이지 맹약(盟約)이 아니다” 하며 조용히 돌아왔다.

쌍방(雙方) 간에 분쟁(紛爭)이 생겼을 때,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점을 찾는 것 중에 ‘절충(折衷)’이라는 것이 있다.

양쪽이 조금씩 양보해서 합리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물론 현대적 의미는 옛날과는 다소 다르다.

준조절충과 비슷한 말로 ‘준조지사(樽俎之師)’가 있다.

 

※ 안영 : 중국 제나라의 정치가. 시호 평중(平仲). 통칭 안자(晏子)라고 한다.

제나라의 영(靈)·장(莊)·경(景)의 3대를 섬기면서 근면한 정치가로 국민의 신망이 두터웠고, 관중(管仲)과 비견되는 훌륭한 재상이었다.

 

※ 『안자춘추(晏子春秋)』 : 중국 춘추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명재상 안영∼BC 500)의 언행을 후대인(後代人)이 기록했다는 책.

<해오름학원장, 극동정보대 겸임교수 서범석의 한자여행>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