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옥

내게는 절대 바꾸지 못하는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유성이발관은 주인이 세 번 바뀌었어도 아직도 다니고 있고, 형제양복점은 중학교 때 단골이 지금도 단골입니다. 올해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잘 알려진 브랜드의 교복을 사고 싶어하는 것을 그곳에서 사도록 하였으니 어지간히 변화를 싫어하는지 스스로 잘 압니다.

일주일에 9일은 술을 마시는 덕에 막걸리 한 잔 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찾는 식당이 있지요.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찾던 곳입니다. 손칼국수와 손두부 요리를 촌스럽기는 하지만 감칠맛 나게 잘합니다. 엊저녁 마신 술로 얼어버린 속을 풀기에는 즉석에서 썰어 삶아주는 칼국수 만한 것이 없고, 눈비 내리는 출출한 날에 한 잔 하는데 그곳에서 직접 만든 손두부 만한 안주도 없습니다. 함께 주는 시원한 동치미 국물의 맛 또한 일품이지요. 잘 다듬어 가늘게 채 썬 돼지의 껍질을 돌미나리에 섞어 새콤달콤 매콤하게 무친 강회의 맛은 둘이 먹다 셋이 없어져도 모릅니다.

칠순이 훨씬 지난 나이임에도 아주머니라 불러주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주인이 있어 즐겨 찾습니다. 동치미 맛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 살짝 올려주면 푸짐하게 한 그릇 담아서 들려주니 사람이 모여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서넛이 얼큰하도록 마시고, 지고추 다져 넣은 칼국수 한 그릇씩 먹어도 주머니 속에서 만 원짜리 두 장만 꺼내면 충분하니 부담도 없습니다. 실비식당이라는 이름에 주인의 마음씨를 얹어 놓은 듯합니다. 이러니 늘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건축현장에서 잡일을 하는 이들로 늘 시끌벅적하지요.

이런 집을 즐겨 찾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치면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리 고갯길을 6년을 걸어서 통학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의 꿈을 접었습니다. 무작정 상경하여 별의별 직업을 전전하였지요. 그때 배운 일이 건축일이었었는데 미장이 주 특기였습니다. 기술수준이 상당히 높아진 후에 한동안 음성에서 건축업을 했는데 그 시절에 즐겨 찾던 선술집입니다.

엊그제 골방에서 두부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술값을 안 받습니다. 목로에서 막걸리를 드시던 분이 우리 술값을 계산했다 하네요. 자주 오는 사람인데 이름이 뭔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방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난 줄 알았나 봅니다. 전에 같이 일하던 미장이였나? 목수나 철근공 그도 아니면 잡일을 하던 사람인가?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습니다. 황당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보니 아는 사람들이 있네요.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술값을 살며시 계산하고 나왔습니다. 내리는 눈발과 어울린 청량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전율이 일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네요. 얻어먹은 것보다 남의 술값 몰래 내주는 기분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내가 공무원이라는 것을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개천에서 용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어쩌다 길에서 만나도 손을 잡고 놓아줄 생각을 잘 안 합니다. 그런 것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골방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그런 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이 부끄럽네요. 이처럼 믿음과 신뢰를 주고 있는데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오십이 넘었어도 소갈머리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막걸리 한 잔 하는데도 남들이 볼까 두려워하고, 아는 사람 보이면 술값을 어찌해야 할지 미리 걱정하는 소인배가 되었습니다. 처지가 딱한 이들을 보고도 무심히 그냥 지나쳐버리는 아무 생각 없는 내가 걱정됩니다.

이제 전에 같은 길을 걷던 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일거리가 없어 때는 굶지 않는지, 지금도 정정한 모습으로 일하고 있는지 가끔은 찾아봐야겠습니다. 막걸리 한 병 들고 세상 사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렵니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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