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남

 

산을 보면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오늘도 산을 쳐다보면서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많은걸 품고 많은 사연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저 묵묵히 침묵하며 서 있는 산.

그 넓은 가슴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끌어안고 포용하고 관대한 듯 하면서도 때로는 다가서지 못할 만큼 두려운 존재로 느껴지는 그 산을 보면 왜 아버지가 생각나는 걸까요?

30여년 전, 젊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 때도 여전히 체구는 작으셨고 목소리도 낮았으며 늘 조용하셔서 어쩌면 아버지가 더 어렵게 느껴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수도 적으시고 표현도 안하시는 아버지께서 지게 소쿠리에 소꼴을 베어 오실 때면 그 위에 멍석 딸기를 가득 베어 얹어가지고 오셨었지요.

떡보루나 깨금, 머루, 가을에는 으름을 지게 위에 얹어 가지고 오시면 우리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일하시고 집에 오시는 길에 소꼴을 베셨을텐데 그 힘들고 고달픈 중에서도 자식들을 위해 그런것들을 찾아다니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져 옵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딸이 열, 아들 하나.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얼마나 어깨가 무겁고 힘드셨을까? 그것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저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가방,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었지요.

약주를 즐겨하는 아버지께서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날은, 우리를 나란히 앉혀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일본어로 공부하다가 5학년 때 해방이 되어서, 그때부터 가나다라를 배우셨다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친구들이 중학교를 가는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에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아서 마을 뒷동산에 올라가 많이도 우셨다지요.

30여리나 되는 중학교를 몇 번씩 뛰어가서 교문만 쳐다보다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도 안한 우리들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셨었고 정치도 알아야 한다시며 정부의 3부 요인이 누구누구고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는 꼭 알아야된다고 하시면서 약주만 드시면 문제를 내시곤 했었는데, 아버지는 그때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느날엔 차례대로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보라고 하셔서 우리들은 평상시에 놀면서도 그것을 외우곤 했었습니다. 덕분에 사회시험은 잘봤었지요.

어쩌면 초라해보일만큼, 메마르고 작으신 아버지. 며칠 후면 아버지의 77회 생신이십니다.

늘 자식들에게 해준게 없다시며 미안해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이제는 그런 생각 접으시고, 그저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산새들이 하늘로 들판으로 날아다니다가 지치고 곤한 날개를 쉬고 싶을 때 산을 찾아 가듯이, 우리들 열한 남매의 산으로 거기 그 자리를 언제까지나 지켜주세요.

아버지의 삶이 결코 헛되거나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저희들을 통해 충분히 느끼실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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