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옥

 

밤 아홉시가 지났는데도 꽃집은 사람들로 분주하다. 내일이 어버이날이라 그런지 학생들은 꽃바구니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다. 그 틈에 끼어 나도 가계 안으로 들어갔다. 시부모님께 달아 드릴 꽃을 사기 위해 예쁜 모양의 꽃송이로 골랐다.

꽃 사지에는 분홍빛의 카네이션과 노란꽃, 하얀 안개꽃이 어울려 한층 돋보인다. 꽃을 파는 주인은 꽃처럼 화사하고 표정이 밝다. 항상 이맘때가 되면 꽃집은 꽃바구니를 사는 사람들로 붐빈다.

어디 북적거리는 곳이 꽃집뿐이겠는가. 상가마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려는 사람들로 가계주인도 덩달아 바쁘다. 여러 가지 색색의 선물을 보고 있노라니 아버지 생각이 난다.

이십 여 년 전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샀었다. 한 가지 두 가지 준비를 해 놓고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물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고 행복하다.

아버지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 나셨다. 농사꾼의 아들로 어려서 어머니가 일찍 돌아 가셨다. 형님들 틈에서 어렵게 지내다 스무살이 되자 결혼을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횡성에서 원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들이 자식 학교 때문에 시내로 나왔냐고 묻는 말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을 못하셨다. 그도 그럴것이 아침에 나가면 밤늦도록 술 없이는 집으로 오는 법이 없는 아버지셨다. 집으로 들어오시면 밥상은 차려져 있어야 하고, 하지만 어머니가 차린 밥상은 매번 문 밖으로 나뒹굴기 일쑤였다. 아침에 장을 보러 간 날은 우리 식구는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실 때까지 겁에 질리곤 했다. 늦은 시간에도 엄마는 물론 자식들까지 잠자리에 들지도 못했다.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아버지이면 좋으련만 오죽하면 큰딸인 언니는 지금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었다 아버지의 지인이 헐래 벌떡 우리 집에 오셨다. 일을 마치고 술을 먹다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한사람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아버지는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누워 있다고 했다. 파랗게 질린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경찰이 다가와 병원으로 데려 갔다고 했다. 이런 일이 수없이 있다 보니 병원에서도 어디 누구라면 다 알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런 아버지는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술친구 뿐 이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술친구한테 보증을 서준다고 도장을 찍어준 일이 있었는데 돈을 쓴 사람은 야반도주를 했다. 요즘은 드물게 있는 일이지만 그때는 남의 보증서는 일이 허다했다. 때문에 우리집은 논과 집을 다 빼앗긴 채 남의집 창고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는 평생 아버지를 원망만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안일은 뒷전이고 눈만 뜨면 술을 먹기 위해 나가셨다. 술만 아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객지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였다. 몇 년 동안은 고향집에 연락도 끊고 죽은 듯이 살았다.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속의 분노도 서서히 가라않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차츰 아버지 생각에 멍해지곤 했었다. 그러던 그해 생신이 다가왔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생각하며 고향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가을, 뜻밖의 비보가 날아왔다. 온 몸의 기운이 빠지면서 한순간의 원망은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누워계셨다. 몸을 만져보니 이미 싸늘했다.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 손목시계와 금반지, 구두도 사놓고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하며 울먹였다. 그래도 “넌 효녀구나” 하는 말이 들려왔다.

아무생각 말고 편안히 가라고 해도 떠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고. 이렇게 둘째를 보려고 참았었냐고 큰어머니는 혼자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아버지도 나처럼 당신 생신을 기다렸을까? 올해는 특별히 육순이니까 오랫동안 오지 않았던 딸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 가신지 이십여 년이 되었다. 전해드리지 못한 선물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내 마음속에 되살아난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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