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현 옥(음성예총 창작교실 수강생)

메밀꽃이 피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도민체전을 앞두고 손님맞이를 하기 위하여 씨를 뿌려두었던 모양이다. 가뭄 속에 피어난 꽃은 단비가 되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마 전 아주머니 몇몇이서 음성 천 둔치에 앉아 호미질하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였으나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얼마 후 둔치를 따라 길게 이어진 호스를 보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잡풀로 보이는 것들은 사라지고 한 종류만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일부러 구멍을 낸 듯한 호스에서는 작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길을 걷던 나는 둘째 아이에게 그곳을 가리키며 일찍 찾아온 더위를 달래고 있는데 아이가 옆에서 “엄마 저기 저 물줄기는 형아 쉬고, 요기 앞에 있는 것은 내 쉬다.”하는 게 아닌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꼭 그 모양이다. 오랜 가뭄으로 애써 뿌린 씨앗들이 꽃을 피기도 전에 죽을까봐 물을 주고 있었다.
나의 어릴적 추억의 한 조각으로 자리한 음성천 둔치, 이제는 빛바랜 사진처럼 생생한 빛깔들은 사라졌지만 이제 막 피어난 메밀꽃으로 하여 또 다른 기쁨을 기다리게 한다.
메밀꽃은 이상하게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왠지 어디엔가 또 다른 나 자신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어쩌다 불어온 바람에 메밀꽃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보리가 바람에 일렁이는 풍경을 사진 작가들은 맥랑이라 한다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친 모습은 그 보다는 가련하되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을 보면 어스름해지는 저녁 무렵에 메밀꽃은 더욱 환상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음성천 둔치의 꽃들을 바라보았으나, 아직은 때가 이른 것일까.
가뭄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지 키가 들숙날숙이다. 어느 것은 다 자라 꽃을 피워 놓고 뽐내고, 어느 것은 이제 막 땅을 비집고 나오고 있어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개천의 물도 말라 가는지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 목마름이 언제까지 이어질는지. 깊어 가는 농민들의 시름을 하늘은 외면이라도 하는 듯 구름한점 없이 맑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도민체전이 연기되었다. 비록 긴 가뭄으로 도민체전이 연기되었지만 농민들의 아픔을 보면서 축제를 강행했다면 진정한 의미의 행사를 치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커진다.
우리는 잊고 지내는 것이 많다. 내 아픔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내 것, 우리 식구, 우리 단체 등등... 만을 위해 즐거움을 찾아 떠난다.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외면한다. 아니 말보다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고있다. 거기에 비한다면 이번 도민체전을 연기한 일은 뜻 깊은 결정이었다.
개인의 일을 변경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도민체전으로 단장을 마친 음성천 둔치의 모습이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나눔의 사랑으로 조금이나마 시름을 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렵게 키워 낸 음성천 둔치의 메밀꽃은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꽃망울들을 터트리고 있다. 보다 나은 미래를 기다리며, 비록 도민체전을 빛낼 기회를 놓쳤다해도 음성천을 지나는 이들의 가슴을 서정으로 촉촉하게 적셔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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