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옥

마을을 지나 농로에 차를 세웠다. 황금색의 벼가 일렁이고 있는 이곳에서면 넓은 콩밭과 복숭아밭이 보인다. 야트막한 산을 올려다본다. 온통 푸른색을 띄고 있는 소나무와 빨간 단풍나무는 누렇게 익은 벼와 어우러져 한 폭의 가을 풍경화이다.

얼마 전, 남편은 이곳에 땅을 구입했다. 지금은 논으로 되어 있지만, 포크레인으로 일구어 복숭아나무를 심을 생각이다.

남편은 포크레인 일을 한다. 장비 일을 하다 보니 일이 있는 날은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선다. 때문에 아침밥은 거의 먹지 못하고 우유에 미숫가루를 타서 마시곤 한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부지런을 떨어 아침밥에 국을 끓여 한 숟가락이라도 뜨게 하는 일 뿐이다. 직업 때문인지 땅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이 예사롭지가 않다.

“물은 구멍 뚫린 배수관을 묻어 받아 내야지. 일찍 수확하는 천중도는 맨 앞에 심고 다음은 맛이 좋은 백도를, 그 다음은 늦은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수확하는 엘바트 품종을 심자. 자투리 공간에는 콘테이너 박스를 가져다 놓고 여기에서 라면도 끓여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사뭇 들떠있는 남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땅을 갖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남편은 이십 여 년 넘게 포크레인 사업을 하였다. 지금은 워낙 기름 값이 비싸 수입이 별로 없지만 그 때만 해도 한 달 꼬박 일을 나가면 꽤 많았다.

남편은 칠 남매 중 넷째이다. 가정 형편상 남편이 벌어오는 돈은 동생들 학비와 부모님 생활비로 들어갔다. 효성 깊은 남편은 부모님이 어깨를 펴고 사시라고 다섯 마지기의 땅을 사 드렸다. 그러다보니 정작 자신의 땅을 갖고 싶은 꿈을 접고 살아온 세월이다. 이제 마음속에 있던 꿈을 이루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땅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농사를 짓겠다는 우리 부부를 보고 어떤 이는 지금 와서 무슨 농사를 짓느냐며 그냥 포크레인 일이나 하라고 충고를 한다. 물론 농사를 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남편 역시 포크레인 운전은 베테랑이지만 농사짓는 일은 그저 부모님 곁에서 도와준 정도이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우리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려 수확의 기쁨을 맛보고 싶은 조그만 소망이 있다.

삼년 전 남편은 남의 땅인 야산 밭을 일구어 배추와 무 그리고 들깨를 심은 적이 있다. 들깨 모가 저렇게 연약한데 무슨 깨가 된다고 저럴까. 나는 남편의 고집이지 싶었다. 산골 구석진 밭이라 차 없이는 가 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새벽같이 일어나 밭으로 가서 들깨모를 심고 또 다른 날은 배추와 상추 등 여러 가지 야채를 심었다.

한 열흘 쯤 지난 뒤 남편을 따라 나도 밭으로 가보았다. 연약 하던 들깨 모가 아기 손가락만한 굵기로 자라 있었다. 대견했다. 점토질이라 며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배춧잎이 시들해졌다. 기운을 잃고 있는 배추를 보면 남편은 밭 언저리의 웅덩이에서 물을 퍼다 준다. 그러면 배추는 금새 꼿꼿하게 일어섰다. 이 맛에 농부는 열심히 물을 주고 키우나 보다. 그 덕에 그 해 김장배추는 푸짐했다.

처음 농사를 지었는데도 들깨는 잘 영글어서 서너 말이나 되었다. 밭에다 곡식을 심을 때는 꼭 수확을 기대하고 심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남편이 쉬는 날이면 답답한 아파트를 떠나 바람이라도 쐴 겸 함께 가서 이것저것 소소한 것들을 심었다. 그런데 우리가 먹고도 이웃과 정을 나눌 만큼의 들깨를 수확을 했다. 얼마 되지 않은 수확이지만 농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해였다.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논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흐뭇해 보인다. 나도 남편 옆에 서서 우리 땅에 심을 곡식들을 여기저기에 자리를 정해 놓았다. 복숭아나무 사이에는 몸에 좋다는 서리태를 심고, 가장자리에는 산딸기나무를 밭 언저리에는 대추나무, 단감나무, 살구나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부부는 이제 남부러울 것이 없다.

<가섭산의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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