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내가 바람이 난다면 그 계절은 가을일거라고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 뒤로 친구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내 눈치를 살피다가 한마디 건 낸다.

“잘 살고 있네.” 우스개지만 농담보다 더 진한 십년지기의 걱정이 녹아있다. ‘계절 중에 가을이 제일 좋더라’ ‘가을을 많이 타나 봐’라는 표현을 두고 바람이라는 경박스런 말을 써서 친구에게 걱정을 줄 만큼 나의 증세는 중증이다. 술 취한 사람은 멀쩡하다 우기고, 정신이 나간 사람은 정상이라고 쉽게 말하는데, 나는 중증이라는 자가진단을 내렸으니 처방도 내가 하련다.

청진기를 가슴에 대 볼까? 아니 부질없는 짓임을 안다.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눈을 감는다. 지난 날 환영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 가을날이다. 교정에 앉아 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소녀가 있다. 눈시울이 붉은 소녀는 손을 모은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온 몸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자정을 넘긴 시각에 믿기 어려운 경험을 한다.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잠에 빠진 소녀가 흘려버려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마침내 잠에서 깬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 나 이불을 갠다.

“이불은 왜 개니?”

“아침이잖아요.” 이불을 갠 소녀가 양말을 신는다.

“양말은 왜 신니?”

“아침밥 하려고요.” 순간, 소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찬물을 확 끼얹은 듯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소녀는 정신을 차려 방안을 살핀다. 시계바늘은 새벽 두시를 지나 있었고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등을 보이고 앉아있었다.

“그냥 자거라.” 공포에 휩싸인 소녀에게 여인이 힘없이 한 말이다. 소녀는 요를 다시 펴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제발 여인이 다가오지 않기를 빌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꿈과 생시를 구분 할 수 없던 몽롱함속의 공포는 등줄기에 돋아났던 소름처럼 사라졌지만, 소녀의 가슴에는 어른발자국만한 멍울이 생겼다.

엄마는 내가 아홉 살 때 돌아 올 수없는 곳으로 가셨다. 엄마가 떠나고 십년이 지나서 엄마 얼굴을 그려보려 했다. 파마머리에 얼굴선까지는 그렸는데 눈, 코, 입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질 녘 가을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엄마’하고 부르면 저 편에서 ‘응 아가’하는 음성이 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하늘나라의 문을 두드리듯 하늘을 보며 기도했었다.

기도를 한지 달포가량 된 그날 밤 - 꿈이 아니었다. 어른발자국만한 멍울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엄마의 흔적이었다. 가슴에 멍울을 갖고 사는 건 고통이 따랐다. 그리움이 밀려올 때 고독의 강에 발을 담그거나, 허우적거리다가 침잠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나 혼자 있는 날이 유독 그랬다. 멍울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다가 혼자 있을 때만 모습을 보였다. 홀로 짊어져야 하는 몫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것이 요동이라도 치는지 가슴이 울먹울먹할 때가 많다.

멍울은 가을을 닮아 있었다. 화려했던 단풍이 지고, 바람에 나뒹구는 거리에 낙엽 같았다. 낙엽이 아름다운 군무의 절정을 회상하며 흘리는 눈물이라면 내 안의 것은 엄마를 향한 눈물이리라. 나는 산에 물든 단풍을 보며 잎사귀를 떨어뜨려야 하는 기약된 이별의 슬픔이라 여겼다.

그리움이 밀려오면 하늘을 본다. 신비한 경험을 한 내게 가을하늘은 영혼이 통하는 길이다. 가을하늘에 그리움을 풀어 놓으면 그리움이 빠져나간 자리에 후회가 스며든다. 지난 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외면했던 일이 생각나 한 숨 지면서도 또 하늘을 본다.

그날의 기억은 그리움을 아로새겨 가슴마저 아리게 만들었으니, 필경 가을에 일이 날 것이다. 남편이 눈치를 채기 전에 처방전을 받아 바람기를 잠재워야 한다. 가슴에 처방전을 묻는다.

그리움이 쌓인 병입니다. 하늘을 보며 달래겠습니다.

나의 그리움이 그 곳을 향하고 있기에…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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