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아침상을 물리고 여동으로 내려가는 길을 걷는다. 기지개를 등 뒤로 켜며 숨을 들여 마쉰다. 산바람을 먹고, 피로를 내 뿜기라도 하듯 큰 숨을 고르며 걷다가 발길을 멈춘다. 눈이 쌓인 날에는 가슴 조이며 오르던 길이다.

큰 눈이 오고 며칠이 지난 때였다. 그늘진 곳이라 내린 눈이 녹지 않아서 차가 헛바퀴를 돌았다. 바퀴에 체인을 감았지만 쉽진 않았다. 엔진 소리에 백구가 짖고,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님이 집에서 나오셨다. 어머님이 차를 밀기 시작한지 몇 차례 차가 언덕길을 올랐다. 하지만 이내 미끄러졌다. 고샅을 연결한 난간도 없는 다리까지 차가 밀려가자 어머님은 어린아이 달래듯 차를 두드리며 막아섰다. 높은 벼랑은 아니지만 다리 아래는 바위가 대부분이다.

행여 차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다가 어머님을 덮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끔직한 상황에 나는 눈을 감았다. 다행히 차는 다리에서 멈춰 섰다. 나는 차 안에 걸어 놓은 달마대사의 그림을 생각하며 눈을 떴다. 어머님은 다리 끝에 서 있었다.

지금 내가 선 길에는 눈의 흔적이 없다. 그리고 누군가 쓸었을 싸리비가 길옆의 나무에 세워져 있다.끝이 닳아 몽톡해진 싸리비는 잔가지가 떨어져 나가 굵은 줄기만 엉성했고, 손잡이를 묶은 노끈마저 끊어져 있다. 몽당 빗자루 앞에 서 있다가 등을 돌려 내가 내려온 길을 본다.

길섶의 겨울나무 사이로 마른 잎이 쌓여있고, 가랑잎 하나 뵈지 않는 길의 끝에 어머님의 집이 보인다.

어느 새벽에 이 길을 지나 어머님을 찾아 뵌 적이 있다. 파마 끼가 풀리고 염색이 바랜 반백의 머리카락은 베개에 눌려 위로 솟아 있었다. 그리고 틀니를 하지 않아 옴폭 들어간 입 주위에는 잔주름이 많았다. 헐렁한 내복 속으로 보이는 살갗에 깊게 패인 주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머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보다도 십년이나 나이가 들어 뵈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나이에 맞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어머님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홀로 농사를 짓는 어른이다. 한번은 들깨 모종을 뽑아 밭으로 옮겨 심는 일을 거들은 적이 있었다. 농사가 처음인 나는 얼마 되지 않아 허리가 아프고 쭈그려 앉은 다리가 저려와 어머님보다 먼저 허리를 폈다. 어머님은 일이 서툰 며느리를 집으로 보내놓고도 두 시간이 지나서 들어오셨다.

어려서 먹을거리가 귀했던 시기를 보낸 어머님의 명절 준비는 나를 아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떡 쌀은 두말을 담그고, 설날에 만두소를 준비해 놓고 보면 한 말은 되어 보였다.

나는 송편과 만두를 빚으면서 수없이 천장을 올려다봤지만 어머님은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것은 보기만 해도 좋다면서 손을 계속 놀렸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난 어머님의 나이를 잊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머님은 일삼아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새색시 때 봇짐을 쌌다고 했다. 두루마기의 소매에 돈을 다발로 두둑하게 넣은 할아버님은 지게에 머리보다 높게 짐을 얹었다고 한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단양에서부터 며칠을 걸어 구티고개를 넘어 보은에 도착했고, 해발 삼백미터에 자리한 산외면 여동골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서 짐을 풀었다고 했다.

일제 식민지와 6.25를 겪은 할아버님은 피난처를 찾아 내 두루마기 소매 속의 돈으로 땅을 사 들였고, 어머님은 그 땅에서 팔남매를 키워냈다. 팔남매가 크면서 땅은 줄어들었고, 소쟁기질만 할 수 있는 자드락밭만 남았다. 그리고 팔남매는 결혼을 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집을 떠났다.

지난봄에 아버님마저 먼 길을 떠나셔서 어머님은 홀로 지내시며, 난리가 나면 친정식구들과 함께 높은지미로 피난을 오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몽당 빗자루로 눈길을 돌린다. 닳아서 해어지는 것은 단연 빗자루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스친다. 빗자루가 쓸었을 길과 비질로 인해 잘려졌을 몽당이를 생각하며 손을 뻗는다.

섣달 밖에 있는 싸리비는 메마르고 찬 느낌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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