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자

바깥 날씨가 추워서인지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져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 유리창 밖을 보니 눈서리가 하얗게 깔려 있어서 눈이 살짝 덮여 있는 듯 하고, 유리창에 서리는 냉기가 차다.

눈을 감고 자는 듯이 명상에 잠기노라면 세상에 안 계신 어머님 생각이 간절하다. 어머니는 시집올 때 단금(이불, 요한 채씩)밖에 해오지 않아서 어른들 모시고 자식 낳아 기르느라고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시집을 와서 보니 식구들이 솜이 없는 광목 홑이불을 덮었고, 시동생들은 등걸잠을 잤다고 한다. 시집온 삼일 째 되는 날에 솜이불을 할아버지에게 냉주고 이불 호청을 뜯어서 덮고 겨울을 났다고 한다. 그 이듬해 겨울에 큰 오라버니를 출산해서 솜이불을 덮었는데 그때까지 이불솜을 마련하지 못해서 할아버지는 홑이불을 덮고 지내시다가 병환이 났을 땐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덮고 몸조리를 했다며 가난했던 시절에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한 숨을 섞어가며 이야기 해 주었다. 어머니는 살림형편이 나아지면서 제일먼저 장만한 것이 목화솜으로 이불을 만들어 식구들이 편하고 따뜻하게 잠자리에 들게 했다며 방바닥을 두 손으로 쓸어 모은다. 아마도 방바닥에 따뜻한 온기를 감지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함이리라.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이조 고종 말년에 황제가 일본으로 볼모로 가고 일제 36년간에 강점기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다보니 그 설음과 핍박을 어찌말로 다 하였으리.

어머니는 어려움 속에서 딸을 낳으면 이불만은 양금(두 채)을 해 주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곡식이며 낱그릇, 숟갈 등을 공출해 갔고, 심지어 목화솜까지 책출해 갔다고 한다. 목화농사를 하여 무명을 짜고 누에를 길러서 명주를 짜서 팔아 살림에 보탬을 많이 했다고 퇴고 한다.

베틀에 앉아서 밤을 세워가며 베를 짜는 어머니에게 기대어 잠들던 때가 흑백 필름을 펼쳐놓은 오래된 영화장면 같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언니와 나에게 이불을 많이 만들어주셨다. 볏섬 같은 이불을 다섯 덩어리를 해주고 방석이며 베개를 모아서 한 보따리를 더해서 이불 보따리만 트럭으로 반이 넘었다. 6자 장롱에 화장대, 놋대야, 놋요강 두 개 등 신부가 필요한 것은 모두 준비했다. 옷은 아래옷, 윗옷, 속옷 등을 죽(열 가지)으로 해서 혼수를 많이 받아서 좋다고 시어른들이 좋아했다. 그때에는 혼수를 많이 해왔다고 입 소문이 나면 몇몇 칠이고 혼수구경을 시키느라고 시어머님이 분주했던 모습이 기억의 한편에 박혀있다.

지금도 어머니가 해준 장롱 속에 솜저고리, 모시적삼, 속옷가지와 앞치마가 남아있고 볏섬 덩어리만한 솜이불이 깨끗한 채로 서너 개가 있다.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스며있는 이불과 옷들이 지금은 짐이 되고 있다.

딸은 어머니의 모든 것을 닮는다고 했던가? 나는 딸을 시집보낼 때 이불을 많이 해주었다. 그 중 한 채만은 목화솜 이불을 해주었는데 그 이불이 되돌아와서 쌓여있다. 어머니가 평생을 벼르면서 공들여 만든 솜이불인데 지금은 애물단지가 되어 폐물이 되어간다.

태워버리자니 어머니 생각에 망설여지고 버리자니 아까워 못 버리고, 간수 하자니 신경이 쓰인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솜이불을 덮어 보니까 따뜻하기가 캐시미어 솜보다 좋았다. 흠이라면 솜이 너무 두껍다는 것이고 세탁할 때 손길이 많이 간다는 것뿐이다.

요즈음 직물 컬러색이 발달되어 이불의 빛깔이 고급스럽게 곱다.

지금은 색상의 명암의 광도에 따라 갖가지 무늬를 놓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시각에 맞춘 이불 호청이 세련되어 보인다.

시집온 지 45년을 넘게 사는 동안 세상과 나 , 문화와 문명이 많이 변했다. 전기에너지로 주거 환경이 좋아져 따뜻한 솜이불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가볍고 질기다는 나일론 캐시미어 솜, 구름솜이라는 데프론솜이 어찌 숨 쉬는 목화솜에 비유할까?

혼수가 필수가 아닌 결혼문화정착에 딸 많은 집 기둥뿌리 흔들린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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