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영

산짐승 들은 죽을 때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찾아가서 편안한 최후를 맞이 한다고 한다.

오늘 산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박새 한 마리를 보았다.

수명이 다 해서 최후를 맞으려고 찾아간 장소가 그 곳 이었을까?

아니면 겨울 막바지에 내린 폭설 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이다가 동사 한건 아니었을까?

한 참을 바라보다 흙으로 덮어 주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아직도 그 새의 죽은 연유가 궁금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언제부터 인가 죽은 새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 진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에 우리 집에는 공기총이 있었다.

총신을 거꾸로 땅에 대고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공기를 압축시켜 사용하는 산탄총 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부터 겨울이 오면 친구들과 어울려 그 총을 들고 새를 잡으러 산과 들을 헤집고 돌아 다녔다.

살아있던 생명이 총알을 맞고 깃털 몇 개 사뿐히 흩날리며 수직으로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물체가 되었다.

난 통쾌한 그 순간을 만끽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애처롭고 가슴 쓰린 일이었지만 그 때에는 굉장한 쾌감으로 느꼈다.

우리 동네는 한가운데로 조그만 개울이 가로질러 흘러 자연스레 한동네가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쪽으로는 해를 등지고 있다고 해서 응달마을 이라고 불렀고 서쪽은 그 반대로 양달마을 이다.

개울엔 언제나 유리알 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

아낙네 들이 나와 빨래도 하고 야채도 씻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는 곳이다.

들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곳에 들려 손, 발이나 연장을 씻기도 했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한겨울엔 동네꼬마 들이 모여 썰매를 타고 팽이도 치는 유일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청년들은 긴 지래 대를 들고 상류 쪽을 오르내리며 얼음 밑 돌 들을 들춰 미꾸라지와 송사리를 잡기도 했다.

내가 살던 시골에는 독특한 이름의 골짜기도 참 많았다.

응달마을을 지나 계곡 쪽 으로 올라가면 해가 뜨는 쪽 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햇 골이 있다.

햇 골을 시작으로 해서 요골을 지나 장내미로 넘어갔다.

거기에는 우리 밭이 한 뙈기 있어서 평화롭던 어린 시절에 농사일을 두루두루 체험했던 창골이 있다.

따듯한 봄날 아버지를 따라 소를 몰며 밭고랑을 일구고 두엄을 뿌려 고추와 참깨, 고구마, 감자를 심었다.

밭가에는 동부, 콩, 옥수수도 듬성듬성 심었다.

그때 시골에는 특별하게 즐겨 먹을 수 있는 간식이 별로 없었다.

후미진 밭가에 심었던 토마토나 참외 몇 포기가 전부였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삶은 옥수수와 찐 감자를 맛있게 먹었던 생각도 난다.

참외랑 수박 농사를 지었던 어느 해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이 만만하게 참외서리를 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었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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