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희

지난 가을 모 기관에서 받은 교육 중에 ‘생태 활동을 위한 글쓰기’란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자연을 바로 바라보는 시각과 자연을 이용한 활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생태라는 말이 딱딱하게 생각되고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의를 들은 계기로 생태 체험을 통해 자연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생태적인 것에 대해 고민해보기도 했다.

생태적인 삶이란 지구 생태계를 생각하면서 사는 삶, 자기의 삶이 지구 생태계와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고, 그 속에서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삶이다. 라는 것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어린 시절, 유난히 신발을 아끼던 나는 엄마가 새 신발을 사주시면 흙이 묻을 까봐 신지 않고 며칠 동안 책상위에 올려놓고 신지 못했다.

모처럼 새 신발을 신고 학교 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다.

그렇게 아껴 두었던 새 신발을 신고 학교 가는 길에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의 속상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유난히 깔끔을 떨었던 나는 시골에 사는 것이 싫었다.

플라터너스 나무가 울창한 여름이면 학교의 운동장은 송충이들의 집합 장소 같았다.

나무 아래에 있으면 낙엽 떨어지듯 뚝뚝 떨어지는 송충이로 인해 학교가기가 싫었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소독을 한다고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보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발에 밟히는 그 물컹거리는 느낌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렇게 시골 생활 속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TV에서 보이는 서울의 모습 중 높은 건물도 부러웠지만 잘 포장되어진 길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언제쯤 흙을 밟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고 느끼는 걸 보면 나도 나이가 드는가보다.

요즘 사람들은 웰빙이라는 말에 묻혀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친환경 채소니, 유기농 재배니 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마트에 가 보면 웰빙이란 글씨와 유기농이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한 말로 그 물건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잠시 왔다갔다하며 고민을 하다결국 사오게 된다.

그 물건 값이 다른 것에 비해 비싼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물건 값이 비싼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유기농이라고 써있는 것을 사지 않고 보통 물건을 사서 가족에게 먹이면 가족의 건강에 이상이 생겨 큰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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