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영

지난 정월에 홀로 계시던 우리 엄마 영원히 편안한 곳으로 떠나셨다.

기가 막히고, 안타까워서 장례를 치루는 기간 동안 참 많이 울었다.

부모님께서 이승을 떠나는 슬픔이야 누구나 다 똑같겠지만 나에겐 남다른 아쉬움이 있었다.

난 스무 살이 시작 되면서부터 내 뜻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철이 없었던 그 때에 오로지 음악만을 하고 싶었다.

취미로 시작 했지만 꿈과 포부가 생겨 부모님의 반대를 일거에 무시한 채 기타 한 대 둘러메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

그 일은 일정한 수입이 없는 일이라서 생활의 안정성도 없었다.

돈에 대한 집착도 없었기 때문에 남들과 달리 번듯하게 살지도 못했다.

그런 나에게 부모님은 실망을 많이 했고 난 늘 죄스러운 마음 이었다.

내 인생 중 한창 황금기였던 삼십대에는 깊은 생각도 없이 사업을 하겠다고 뛰어 들었다가 크게 실패를 했었다.

그 때에도 철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 였지만 용기백배한 젊음이 있어서 툭툭 털고 쉽게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다가 사십대 중반에 격은 또 한 번의 실패는 IMF의 불황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실패를 하지 않았더라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겠지만 이제 중년이 된 나이에 고향 이라고 찾아온 것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찾아오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처님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지켜보시던 부모님께선 얼마나 가슴 아픈 날들을 사셨을까?

엄마 영정 앞에 쭈구리고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는 나를 본 친구가 “그만 울어라 무얼 그렇게 자꾸만 울고 있냐?”라고 했다.

남들이 보았을 때, 또 우리 형제들도 그런 나를 의아하게 생각 했겠지만 그건 내가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까지도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엄마는 형님 댁에 계셨었다.

나는 이삼일에 한 번씩 엄마를 뵈러 들렸고 이젠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슴 아프게 해드린 죄 다 만회할 수야 없겠지만 살아 계시는 동안 조금만 이라도 좋은 모습 보여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나에게, 내일 보건소에 약을 타러 가는 날인데 형이 며칠 동안 출타 중이라 돈을 탈 수 없으니 만원짜리 몇 장만 달라고 하셨다.

엄마는 거동이 불편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으셔서 보건소에서 정기적으로 여러 가지 약들을 타다가 장복하고 계시는 처지였다.

지갑을 차에 두고 왔으니까 내려가서 가져다 드리겠다고 하며 문을 열고 나오는데 엄마가 늘 집안에서 입고계신 얇은 파자마 차림으로 따라 나오셨다.

날씨가 추우니 들어가 계시라고 하면서 들여보냈다. 형님 댁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4층 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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