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순(수필가 감곡면 오향리)

양편으로 일렬로 선 나뭇가지가 나라져 짙푸른 터널을 만들고 6m정도의 넓은 길은 마사(磨砂)를 깔아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인 문경 새재 도립공원을 별일이 없는 일요일이면 남편과 찾는다.
오래도록 사철 가리지 않고 찾는 이 곳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달려 수천리에 태백이 우뚝하고 서주 수백 리로 조령 주흘과 천승지국으로 이룩되었다.
산이 높고 험준하여 새들만이 넘나든다고 하여 새 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옛 계림(지금의 경주)으로 통했던 길을 조선시대 때 개설하여 영남에서 한양을 왕래하던 큰길로 신·구 경상 관찰사의 교인 처로 사용되었고, 영남의 유생들은 과거를 보기 위해 험준한 오솔길을 걸어서 몇 달이 걸려 다녔다고 한다.
또한 한말 일제(日帝)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영남 제일, 제이, 제삼 관문(1.3km→1.7km→5.2km)과 조령산성이 남아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편리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나는, 불편하고 어려웠던 생활도 자연의 법칙이라 순응하고 순박하게 살았을 옛 사람들의 숨결이 깃던 이곳을 오래 묵은 인연처럼 자주 들린다.
주로 일 관문에서 괴나리봇짐 대신 배낭을 메고 홍송, 도토리, 밤, 참나무 들이 내뿜는 산소를 뼛속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약간 경사진 오르막길을 3km정도 걸어가면 옛 주막의 문패가 붙어 있는 빈집이 있다. 여기가 우리들 종점이다.
주막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서 나란히 걷고있던 남편이 “앗! 해 두었네.” 나는 무엇인가 하고 살펴보았다. 수령 오 육백 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소나무 옆에 ‘상처 난 소나무’ 라는 제목으로 게시판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V」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 말기(1943년∼1945년)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하여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어지지 않고 있다.」
일제의 만행이 우리 민족에게만 저지러진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울창한 우리 강산까지 산맥의 기(氣)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받기도 했고 지금 육십대 후반에서 칠십대 초반의 사람들이 초등학교 4학년∼6학년 때는 산포도 넝쿨, 송진솔가지 꺾기와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하여 V자로 톱으로 파서 깡통을 나무에 매달아 일일 책임량 0.9l정도를 완수해야만 귀가 시켰으니 수업은 뒤로한 채 간접적인 전투에 참여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런 소나무들이 제삼 관문에서 이 관문 사이에는 수십 그루가 길가에 늘어서 있다. KBS방송사 태조 왕건 촬영소가 되기 전에는 상처를 입고 묵묵히 서있는 이 나무들에 대한 역사의 푯말 하나 없음에 안타까워한 남편은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붙들고 일제의 만행을 이야기 해주면서 애국심을 북돋웠다.
메모 하고있는 내 앞에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 둘이서 상처난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불쌍하다.” “아팠겠다.”하는 모습에 내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주막 마루에 깔린 멍석 위에서 우리는 가져온 도시락으로 배를 채우며 세계 2차 대전 말기 최후의 발악을 한 일본은 어린 우리들까지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없게 했던 일과 자정만 되면 실시되는 공습훈련에 눈 비비며 방공호 속으로 숨어들 때의 고통스러웠던 일, 부족한 배급제도에 궁핍한 생활로 콩국에 송기로 새알 떡을 만들어 넣고 죽을 끓여 먹었던 얘기로 열을 올렸다.
일본은 확실히 전범국(戰犯國)이다. 아세아 여러나라를 침략하고 강제로 청년들을 일본군복을 입혀 총알받이로, 14세 이상의 소녀들은 군대 위안부를 시킨 암울했던 그 시기의 일들을 자기네 후손에게는 바르게 가르치기가 부끄러운 모양이다. 달나라 여행도 가능한 21세기다. 과학적 증명에 버티려 하는 꼴이 아니꼽다.
멍석 위에 누워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자장가로 남편은 쿨쿨 잠을 잔다. 남편의 얼굴에 앉은 파리를 쫓고 있는 내 시야에는 상처 난 소나무를 예사롭게 쳐다보고 가는 어른들에 비해 새싹들의 나무 사랑하는 그 마음이 동트는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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