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억새밭을 지나면 둔덕이다. 노을 지는 하늘이 다가오면서 눈부신 가을이 펼쳐진다. 벼이삭은 물결로 출렁이고 그 너머 낫을 든 농부의 모습도 평화롭기만 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결실에 대한 자부심보다 황금물결을 보며 모든 고초를 잊었을 것 같다.

못자리 할 때는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분다는데 어찌 견디었을지. 장마가 지면 또 밤잠도 설치면서 돌보았을 테니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서 숙이는 이삭을 보고 한 시름 놓았을 것 같다. 더불어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금방 낫을 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가을볕 중에서도 까치놀이라고 하는 해거름 볕에 익어야 한다는 것이다.

까치놀은 해가 지기 직전의 얼마 되지 않는 볕을 뜻한다.

한여름과 한낮의 볕이 허우대를 키운다면 가을 중에서도 해거름 까치놀은 보다 깊은 내실을 익힌다고 했다.

볕 발은 약하고 시간도 짧은 것 때문에 더 온전히 영근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 식으로 남은 날을 익혀야 될까. 까치놀을 단순한 글귀로만 생각했던 만큼 남다른 시도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수고하고 애쓴 만큼 거둔다는 것을 생각하면 초조해지다가도 농사꾼이 같은 값이면 서쪽의 논밭을 택한다는 데 힘을 얻었다.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밀쳐 두기 쉬운 볕으로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일까.

아직 하루가 꼴깍 진 것은 아닌 오늘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의욕에 비해 몸의 기능이 떨어지고 그 여파로 갈등을 겪는다.

농부도 역시 태풍이 지나고 가을이 될 때는 한 시름 놓았다가, 벼가 쓰러지는 등의 걸림돌에서 마지막까지 가는 익힘을 깨닫지 않았을까.

나 자신도 지는 볕은 ‘기껏 해 봤자’ 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이삼십 대의 그것은 아침볕 같고, 나이 들어서의 그것은 저녁볕같이 흐지부지 된다고 하찮게 여겨 온 것이다.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가 뜻밖의 거둠을 촉진하는 걸 몰랐다.

넘어가는 볕에 하루를 익힌다는 것과 한 해를 구워내는 가을의 볕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마지막 볕이라도 그냥 말리면 부스러지기 때문에 눅눅했던 날씨가 밤으로 건조해진다.

천고마비의 계절도 맑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을에도 여름 못지않게 태풍이 지나간다. 가을비에 더 말갛게 씻기는 것처럼 때늦은 역경에 원숙한 인품으로 다져진다.

송편을 빚을 때 소를 박는 콩도 무르익지 않으면 풋내가 난다. 다 익은 것 같은데도 그랬다. 맛이 없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맛이 있지만 겨울을 나고 씨 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과일도 자칫하면 떫은맛이 나는 게, 겉만 익었을 뿐 깊은 맛까지 침투되지 않았다.

바로 그 결정적인 부분을 익히는 게 가을볕이다. 마지막 하나가 첨가되지 않고서는 맛을 낼 수 없는 한계와 익어도 익은 게 아닌 허점을 보완한다.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농부는 그 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이삭만 출렁인다. 알곡만 거두려는 마음이 새삼 경건해 온다. 나 또한 볕 하나라도 알뜰히 받아 시시콜콜 익히는 날들이고 싶다.

때가 되지 않았다면 기다려야겠지. 해껏 영그는 곡식들처럼.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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