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숙

추석을 앞두고 시작되는 벌초. 벌초 날짜를 잘못 잡았나 보다.

가을비가 내린다.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근처 슈퍼에서 일회용 우비를 샀다.

산간 마을의 풍경이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 숲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인가는 아득해진다.

이곳은 대대로 내려오던 공동묘지. 조금은 음침한 산골짜기다.

올라 갈수록 귀 기울여 보면 나무 가장자리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 산제비 날개 펄럭이는 소리, 빗물 무게에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온갖 자연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이곳의 적막은 차라리 숙연했다.

축축하게 젖어든 묘지들이 흡사 섬처럼 점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사방을 돌아봐도 다시 봉긋한 봉분을 만난다.

더러는 그 형태가 무너지고 나무가 봉분을 차지한 곳도 있지만 공동묘지는 무명초들의 마지막 쉼터가 아닌가.

산자락 능선마다 아릿한 옛 그림자들이 고적하게 누워있으니 산자와 죽은 자의 그 경계가 선명하여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 하다.

사실 능선을 오르며 떠들어 대는 목소리가 잡음이 되어 우리가 침입자요. 이방인인 셈이다.

유씨 집안은 대대로 합장하는 풍습이 있다.

고조 시할아버지 내외분이 합장이고 시할아버지 내외분도 합장이다.

그리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또한 합장을 했다.

그러나 증조 시할버지와 증조 시할머니는 떨어져 계시다.

지금 올라가는 이 능선 정수리에 증조 시할머니가 묻혀 있다.

증조 대에서만 합장을 마다하고 왜 떨어져 있을까? 사연은 이러하다고 한다.

그 당시 증조 시할아버지가 물러 받은 재산이 넉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재산을 자손들이 온전히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듯이 증조 시할아버지께선 풍류와 시류에 휩쓸렸던 모양이다.

당시 기생집도 다녔고 긴긴 겨울엔 노름판도 끼였고 남의 빚보증도 섰다는 것.

그러니 살아생전 원수 같은 남편 곁에 묻히고 싶겠는가.

저 산골짜기와 이 공동묘지에 툭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소원을 자손들이 시행하지 않았나 싶다.

살아생전 슬프지 않은 생은 없고 남겨진 사랑도 할 말들은 많다.

녹음을 불태우던 여름 뙤약볕은 어디로 가고 비바람 속에 남의 집 처마 밑을 서성거리던 시절, 마음껏 사랑하고 욕심껏 살기위해 애간장을 끓였던 것을.

그 누가 세세히 기억하고 알아주리.

문득 어디선가 꺼억 꺼억 구성진 호곡(號哭)에 이어진 하관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살았던 살붙이들이 찾아와 마지막 길을 배웅하던 그 속에서 애달피 우는 상주…….

그렇게 한 세대를 보내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 이곳엔 노목들의 넉넉한 품 사위와 바위틈엔 이끼들이 박음질 되어 있다.

흡사 이 산등성이 척박한 곳에 풍장으로 드러낸 뼈 한줌이 통곡으로 한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싶다.

하산하는 산길에서 썩어가는 낙엽더미를 힘껏 밟는다.

내년에도 이곳으로 벌초를 와야 한다.

내가 다녀간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려고 다리에 힘을 준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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