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집을 나설 때 50m 정도였던 가시거리가 잠깐 새 20여m로 좁혀졌다. 갑자기 뭔가 나타날 듯 오싹한 느낌이었으나 볕이 들면서 외부와 단절될 것 같은 공포감도 사라졌다.

서울 시내를 20cm 두께로 덮은 안개도 물 한 컵 분량이라고 한다. 한 컵 물이 600억 개의 미립자로 분리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걱정이 반찬이면 그렇듯 상다리가 부러진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사람 때문에 ‘기우’ 라는 말도 생겼다. 70%는 전혀 터무니없는 일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는 이미 지나간 일이다.

600억 개의 미립자를 컵 하나에 모으는 것으로 세상이 뚫린다면 걱정도 섭리라는 명제 속에 넣을 수 있다. 안개를 모아서 물로 바꾸듯 하면 간단한데 쉽지는 않다. 안개가 걷히면 유달리 맑은 것처럼 마음이 정화될 수도 있으나 습관이 되면 곤란하다.

반 정도 남은 술병을 본 사람이 ‘애걔걔, 요것밖에 남지 않았네?’ 라고 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은 ‘무슨 소리, 아직 이만큼 남았는데’라고 반문하였다.

세상은 그렇게 보기 나름 생각하기 나름이었으니, 같은 상황에서도 투영되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그까짓 술 한 병이 뭐 대수냐 할 테지만, 삶의 전반에 적용될 것을 생각하면 여파는 작은 게 아니다.

애걔걔 라는 말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 주제넘은지 몰라도 ‘겨우 이거야?’ 라는 불만 의식이 깔려 있다면 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여간해서 만족하지 않는 기질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이유 없는 불평은 성격 형성에도 문제가 된다.

명랑한 사람이 걱정이 없어 그렇듯 밝은 표정이겠는가. 있다 해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것이다. 방법도 간단하고 생각으로 좌우되지만 쉽지는 않다.

작은 불씨가 불을 내듯 think(생각)와 thank(감사)의 차이점은 간단했지만, 생각 하나로 감사할 일을 찾으면서 가치관까지 바꾸는 건 예사로운 게 아니다.

‘애걔걔’가 무시하는 쪽이라면 ‘아직도’는 여건에 감사하면서 자신을 가라앉히는 자세다.

‘아직 멀었어’ 라는 타성보다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다. 똑같은 ‘아직’을 전제로 하면서도 하나는 절망에 빠져 살고 다른 하나는 소망을 품는다.

걱정으로 해결될 일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풀린다. 걱정거리가 있다고 몸을 달구는 건 안개를 치운다고 삼태기나 빗자루를 들고 설치는 것과 같다. 퍼내거나 쓸어낼 것도 아닌 것처럼 조바심 칠 게 아니다.

걱정이 습관성이라면 모든 병은 근심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추이를 지켜보라는 뜻이다. 중요한 건 소망을 잃지 않는 자세이며 그 생각이 곧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세상은 결국 참 살기 쉬운 것 같지만 간단한 게 더 까다로운 걸 생각하면 훨씬 어려울 수 있다.

난이도가 높은 문제는 괜찮지만 난이도라고 말할 계제도 아닌 문제에 발목을 잡힌다.

모든 게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아직도’ 라고 하는 개념은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소망은 존재하는 게 아닌 만드는 개념으로, 나쁜 이미지는 속히 잊고 좋은 것은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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