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숙

이곳 시장 입구는 선술집이 많아 주머니 가벼운 남자들도 목을 축일 수 있는 골목이다.

한데 저기 저 남자, 저녁시장 볼 시간인데 벌써 자기 자신도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퍼 마셨는지 비틀거린다.

걸음걸이도 종잡을 수 없어 지나가는 사람이 먼저 비켜서게 하고, 그러다 용케 전봇대 앞에선 멈춰 서곤 한다.

나는 내 볼일을 보면서도 연실 두리번거린다.

저 남자의 행색이 그냥저냥 지나칠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깔끔한 검은 양복은 그의 흔들리는 걸음걸이하곤 영 어울리지 않는다.

행인들도 그의 거동을 한번쯤 쳐다보고 간다. 술 힘을 빌려 이탈을 꿈꿨던 것일까. 이렇다면 오늘은 성공한 셈이다.

처음 집을 나설 때의 그 평범하고 자연스런 걸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술만 취하면 우리 집으로 올라왔던 아랫집 아저씨가 생각난다.

오실 때마다 노란 주전자를 옆구리에 끼고서 어느새 코는 홍당무에 되여 있었다.

그 아저씨의 단골 메뉴가 됐던 말들은 온통 전쟁얘기 뿐이었다.

그의 삶의 출발점이 전쟁터였는지 모른다.

그곳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고 그리고 전쟁이 끝났는데도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기억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던 것이다.

늘 마지막 행보처럼 만취 상태에서 똑같은 전쟁얘기만 끝없이 하다가 자신을 파묻어버렸으니 결국 술과 친구하면서 전사한 셈이다.

이제 올해도 마지막 달력 한 장 남았다. 정신없이 달려와 멈춰 선 12월의 고갯길. 그 한해를 마감하는 행사를 치른다.

모임은 곳곳에서 그야말로 여러 가지 제목을 달고 열린다.

그리고 그 마무리의 일대 공신은 술이다. 술은 없어도 안 되고 없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좋든 싫든 늘 한자리를 차고앉아서 그 밤의 주인공 행세를 한다.

아무리 술을 못하는 사람도 한번쯤은 취하고 싶은 것이다.

넓은 세상을 동전만 하게 할 수 있다는 술의 위력, 매력적이지 않는가.

저기 저 남자의 이 세상풍경도 동전만 할까.

모든 것이 일장춘몽 같아서 도덕이나 체면, 그리고 욕심과 근심 같은 것으로부터 벗어난 듯 사방팔방 헤집고 가는 저 몸짓은. 지금 이 순간만은 세상바닥이 온통 제 바닥인 모양이다.

그가 왜 초저녁부터 마셔댔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저녁노을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저 남자 머리위로 붉게 넘어서고 있었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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