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옥

넓은 밭에 도착한 버스가 많은 사람을 쏟아 놓았다. 이어 스티로폼박스, 과일박스, 큰 스텐으로 된 찜솥 등 살림살이가 연달아 나온다. 몇몇 일행은 삼삼오오 포도나무가 있는 농장으로 향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가로웠던 포도밭이 오늘은 사람들로 시끌시끌하다.

“와 예쁘다. 조그만 열매가 많이도 달렸네!” 탄성을 지르며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 중에서도 책임을 맡은 이가 있는 듯한 사람들에게 각자 할 일을 맡겨준다.바쁜걸 알았는지 봉사자들이일손을 도와주러 왔다.

이들은 서울에서 온 자원 봉사자들이다. 여성의용 소방대원들인데 몇 년 전부터 음성과 자매결연을 맺고 농촌일손 돕기, 농산물 팔아주기 등으로 교류 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사실 오늘 일정은 이곳이 아닌 다른 농장이었다. 원래는 복숭아 농장이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비가림 시설이 되어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 봉사자가 하늘의 뜻이 이 농장을 도와주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우스갯말을 했다. 가섭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3년전 까지만 해도 사과과수원이었다.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뿌리는 포크레인 작업을 해서 뽑아냈다. 황량한 벌판이 되어버린 과수원은 쓸쓸한 찬바람만이 불고 있었다. 사과나무 가지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딱딱한 토질에 울퉁불퉁한 바닥은 며칠을 일구어 보슬보슬한 흙으로 되어갔다.

밭으로 왕성하게 올라오는 풀 또한 귀한 거름이 되었다. 서서히 농장은 모습을 나타내고 그 이듬해 작고 어린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나무는 주인의 정성과 사랑을 먹고 잘 자라주었다. 그래서 2년이란 세월이 흘러 올해 첫 수확을 보게 된 것이다. 나무를 바라보는 주인은 가슴이 얼마나 벅차오를지 생각만 해도 기쁘고 흐뭇하다.

포도밭 주인인 L언니는 이십 여 년을 경기도 평택에서 포도농사만을 지었다. 그런데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곳은 이제 국제평화도시로 변해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곳 음성에 정을 붙이면서 터를 잡게 된 것이다.

내가 언니를 알게 된 것은 십 여 년 전 음성 창작교실에서 함께 글 공부를 하면서 부터이다. 포크레인일을 하는 남편은 언니의 밭을 일구어 이렇게 농장을 만들었다.

나는 지난주부터 이곳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포도에 대해 아는 것도 없다.

어떤 봉사자가 엉덩이에 납작하고 동그란 물건을 매달고 종종 걸음으로 달음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금새 넓은 포도밭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마도 오늘 하루 즐겁게 맡은 일을 하려는 마음일 게다.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을까.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봉사자들이 짐 보따리가 있는 하우스로 모여들었다. 일사천리로 각자 할 일을 맡는다. 주인이 신경 쓰지 않도록 알아서 점심까지 준비를 해온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봉사란 진정한 마음이 없으면 어려운 일인데도 저들은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대해줬다. 봉사자들의 마음을 알았을까 포도송이들이 오늘따라 더 없이 싱그러워 보인다. 따뜻한 사람들의 마음으로 포도밭이 향기로 가득하다.

이제는 포도밭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오늘 따라 농장주인 언니의 모습이 참 편안해 보인다. <향기로운 포도원>, 이곳 농장의 이름이다. 향기가 있는 곳에는 벌과 나비가 끊이지 않는다. 따뜻한 사람의 향기가 그득한 이곳도 앞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갈 것이리라.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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