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

항아리의 뚜껑을 열자 전신으로 술기운이 전해온다. 유리컵으로 떠서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본다. 저녁노을을 닮은 빛이다.

원래 녀석의 꿈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이른 봄부터 수확기까지 탱글탱글 탐스러운 포도가 되기 위해 달려온 것은 오로지 사람들의 선택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선택 받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모양과 색깔로 저마다의 매력을 과시하는 많은 종류의 포도들. 하나같이 자기만의 특별함이 있다.

마치 생김새와 피부색이 다른 미인들이 참가한 큰 대회와도 같은 풍경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 특별한 녀석들이 차지한다. 독특한 특징이 없는 품종 켐벨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은 드물다.

켐벨은 결국 포도주가 되기 위해 항아리에 채워지고 말았다. 자신의 형태를 온전히 부서뜨리고 삭혀야만 하는 과정. 잠시도 쉬지 않고 발생되는 가스를 다스리며 긴 시간을 인내해야 했다.

그러고나서 서너 달이 지났다. 이제 녀석은 지난날의 모습이 아니다. 포도와는 또 다른 빛깔, 향기, 맛… 이런 특별함으로 가득한 녀석에게 누가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녀석에게서 역경을 이겨낸 한 인간의 생애를 담은 휴먼드라마의 감동을 느낀다.

포도의 짧은 삶도 구비 구비 희로애락이 있는데, 우리의 삶인들 좋은 날만 있겠는가.

불행은 우리 삶 주위에 엎드리고 있다가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 잔잔한 일상을 흔들어 놓고는 한다. 예측불허의 사고나 경제적인 문제를 통해, 혹은 배우자가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통해서도 모습을 드러내는 불청객. 이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나의 삶이 요동치던 그 때, 벗어나려 애썼지만 기진맥진할 뿐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의 온갖 노력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 앞에서 기를 쓰며 애쓰지 말아야지. 너무 세찬 바람은 시간이 흘러야 잠잠해지는 것, 그렇다고 손 놓고 체념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여름 땡볕이 아무리 강렬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미래를 준비해야 꿀맛 같은 포도가 만들어지고, 항아리 속의 고통이 아무리 두려워도 인내해야만 좋은 포도주가 되는 것. 자신의 의지로는 고통을 단축시킬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포도는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던가. 내게 뛰어든 불청객을 내 의지로 떨쳐낼 수 없다면 나도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해야겠다.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어본다. 달콤한 향이 금새 온몸을 감싼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나른함 너머로 잔칫집 풍경이 그려진다.

포도원집 딸의 혼례가 포도넝쿨이 싱그러운 포도원에서 열린다. 활짝 웃고 있는 신랑신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축하객들이 포도주를 채운 잔을 들고 신랑신부의 앞날을 위해 축배를 든다. 잔칫집일수록 더욱 특별한 존재가 되는 포도주. 오래된 꿈을 이룰 날이 가까이 온 것 같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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