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득순

재작년에 수확한 벼를 작년에 주문이 들어오는 대로 방아를 찧어서 팔고 또 인근 식당에 묵은 쌀이란 오명 때문에 시세보다 싼 가격으로 간신히 쌀을 팔았다. ‘쌀값대란’ 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 됐지만 작년에 피부에 닿는 경험을 했다.

지난가을, 벼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다. 농민 단체장이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그것도 못 믿었는지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군청 회의실에서 ‘쌀값 안정을 위한 토론회’ 에 꼭 참석 해달라는 전화다. 가보나 마나 훤한 일인데 절박한 단체장의 목소리에 거절하지 못하고 참석했다.

참석자는 관내 농업에 관계되는 인사들과 농업인을 포함해서 오십명 은 족히 돼 보인다. 토론회를 경청하면서 농민을 대표할 수 있는 분들은 시국 탓과 미질이 좋은 쌀만 고집하고 산물수매 임시가격에도 타군의 눈치를 보는지 특별한 대안에 이렇다 할 묘책을 내놓치 못했다.

이런 일은 고대광실이나 푸른 기와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강구책을 내놓아야 되는 일이지 싶다.

언제나 농민신문 펴보기가 겁난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 첫머리에는 ‘폭우로 인하여 채소 값이 고공행진’ 날씨가 좋고 태풍이 없어서 올해 ‘과일과 쌀값은 적신호’ 명절대비 출하 물량 늘어나 ‘농민들 울상’ 이러한 기사가 절반을 차지한다. 채소가 얼마나 날개가 클까. 또 얼마나 높이 올라간단 말인가 이것이 소비자의 가계 부담이 되면 얼마나 될는지...

나 또한 폭락이란 것에 얼마나 큰 절망과 좌절을 겪었는가. 이제는 폭락이란 말에 내 귀도 내성이 생긴 것 같다.

젊은 날, 한때 여름 무우 값이 좋다하여 내 귀가 얇았는지 무우를 심어서 수확을 했다. 5톤 트럭에 가득히 싣고서 경매를 보았는데 그 당시 운임비 6만원을 주고 나니 단 돈 이천원 을 무우 값 이라고 정산을 해준다. 이것이 정당한 무우 값인가 의심을 했다. 틀림없었다.

집 떠나며 트럭에 올라 탓을 때 아내는 아이들 준다며 튀김 닭 두 마리를 사오라 하고 아이들은 “아빠 콜라 사와 꼭 알았지”한다. 하지만 그 약속을 깰 수가 없어 가져간 돈으로 그 약속을 지켰고 해 설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눈물을 삼키고 돌아왔다.

농사를 시작한지 30년, 쌀농사는 기본이고 여러 가지 농사를 짓다가 이제는 축산으로 뛰어들었다. 이제는 더 물러 설 곳이 없다. 야망도 없다.

한 작물을 배우기까지 얼마나 세월을 소비했나.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헐값에 내다 팔았지만 내년엔 좀더 가격이 좋을테지 하면서 위안을 삼았지만 기대치는 못 미쳤다. 그래도 젊음이 있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쌀, 한때는 물가품목의 오름 내림에 잣대가 되었다. 지금은 주식인 쌀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70년대 초 에는 머슴 일 년 세경이 80kg 기준 10가마였다. 큰 목돈 이었다. 지금의 쌀 10가마는 백 사십 만원이다. 공공요금과 공산품값은 몇 십 배로 올랐지만 농산물 값은 제자리 걸음질 아니 뒷걸음질을 하는 형편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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