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삼성 미술관 리움을 방문한 그날은 11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미술관의 모든 시설은 최첨단의 결정체였다. 전시품들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층을 나눠 전시되어 있었다. 현대인임에도 나는 고미술품에 더 이끌림은 왠지 모르겠다.

요즘은 추상적인 면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많다. 그런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사상이나 이념을 이해하기란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미술품 앞에서 시간을 많이 할애를 했다. 신선이 사는 듯한 높은 산과 계곡, 가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수, 절벽 위, 허공을 향해 비스듬히 누어있는 노송 한그루, 자연과 잘 어우러진 짐승들과 선인들의 모습 앞에선 종종 넋을 잃는다.

한 폭의 그림 앞에 섰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 밖으로 돋보이는 산의 계곡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듯 짙고 옅은 먹색으로 흑백대비로 표현했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겁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을 안개가 감싸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소나무에 둘러싸인 기와집 한 채가 자리했다. 조선시대 후기 문인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인왕제색도>이다. 겸재의 나이 75세 때 그린 것으로 비온 뒤의 인왕산의 모습이다.

안개에 싸여 있는 암석과 나무들, 어디선가 보았음직한 경치다. 하지만 왠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등장하는 기괴한 산세나 안개 낀 경관의 관념적인 풍경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기와집 한 채가 유독 가슴으로 들어 왔다. 한참을 붙박이가 되어 서 있는 내게 K선생이 다가온다.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림 속 기와집의 주인은 겸재 정선과 절친한 벗인 사천 이병연이었다. 자연 그 기와집은 사천이 기거하는 ‘취헌록’인 셈이다. 사천은 1만3000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 문장가였다.

당시 사천은 병환이 깊어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겸재는 그런 벗의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노구의 몸을 이끌고 혼신을 다해 그렸으리라.

겸재와 사천은 한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스승에게 수학을 했다. 사천이 5세 연상이었지만 둘은 무려 60여 년의 세월을 시와 그림으로 사귄 가장 가까운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겸재는 그런 사천이 비가 갠 후의 인왕산처럼 당당하게 쾌차하길 비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취헌록’을 감싸고 있는 탐스런 소나무는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하늘은 겸재의 진심어린 우정을 무심하게 저버렸다. 그림이 완성된 4일 후, 사천은 세상을 등지고 만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의 품안에서 휴식을 구하고 있다. 그곳에서라면 우리들은 가슴을 열고 마음껏 슬픔을 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구의 정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그만큼 친구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원동력이며 기쁨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겸재는 피붙이와 다름없는 사천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거장이었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 문장가이자 진경시인이었다. 두 거장의 우정이 스며있는 그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림속의 기와집 벽이 유난히 희다. 혹여, 벽이 아닌 방문일까. 그렇다면 사천을 보고 싶은 겸재의 마음이 그곳에 따뜻한 햇살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비 갠 후에...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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