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순

시어머니 팔순(八旬)을 맞이하여 온 가족들이 모였다. 어머님 동생들인 외삼촌과 이모들 그리고 2남 3녀의 자식들이 자리했다. 직계 가족만 모였는데도 부부에 아이들까지 참석하니 식사를 하려고 모인 가족 수가 꽤 많았다.

맏이인 어머님을 보고 외삼촌들은 누나가 어느새 팔십이 되었냐고 한다. 시어머님은 젊어서는 고생이 많으셨지만 그래도 노후에는 자식들 다 무탈하고 마음 편히 지내시니 행복하다고 하신다.

건강하게 사시라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조촐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일주일 후면 생신이 돌아오는 친정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 연세는 올해로 딱 100세가 되셨다. 희수(喜壽), 미수(米壽) 백수(白壽)도 지나고 완전한 백수(百壽)가 되셨다. 99세는 백(百)에서 한 살이 부족해 백수(白壽)라고 한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해도 정정하게 백 살 까지 산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니 분명 장수 하셨다.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 일이지만 할머니가 평소 즐기시며 제일 좋아하는 건 커피와 담배다. 커피는 하루 대 여섯 잔을 마셔도 카페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시고 종류도 선택해 마실 정도로 나름 커피 매니아시다. 지금도 큰 댁에 가면 늘 커피를 먼저 내주신다. 특히 담배는 몇 십년 전부터 즐겨 피우시는데 금연을 간곡히 당부 드려도 듣지 않으신다. 커피와 담배만 즐겨도 오래만 산다는게 할머니 지론이다.

할머니 기억력은 지금도 좋은 편이라서 예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들을 꽤 많이 기억하시곤 다시 물어보셔서 나를 놀래킨다. 지난 설에도 몸이 불편한 큰어머니는 세배를 받으시곤 다들 괜찮냐는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할머니는 남편 직장부터 두 아이 대학 보내고 사는 게 힘들지는 않느냐며 세세하게 물어 보신다.

큰어머니는 할머니보다 건강이 안 좋아 작은 아들집에 가 있다가 설이라고 잠시 오셨고, 할머니는 귀가 좀 어두워지긴 했는데 아직도 시골 큰 집에서 혼자된 손자와 증손자들 밥을 해주며 큰 집 살림을 도맡아 하신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야 축복 받은 거고 좋은 거지만 할머니 가슴속에는 지울 수 없이 얼룩진 한(恨)이 많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3남 3녀의 자식들 중 3남 2녀의 자식들 까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할머니에게 평생 멍에를 지게하고 삶을 고단하게 했다.

자식이 앞서 갈 때마다 죄인이 되어야 했고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다. 사람들의 수근거림 속에 재작년 친정 아버지 장례식에는 참석도 못하고 집에서 혼자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하셨다.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할머니는 애환으로 점철된 한 세기를 사셨다. 마땅히 장수를 축하 받아야 할 기쁜 일인데 할머니는 살아 있는 게 천형 같은 피할 수 없는 형벌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 그런 것을 어찌 하겠는가.

천수를 다하시는 그 날까지 그저 무탈하게 지내시길 소망하지만 할머니를 뵈면 늘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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