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구국공신 비문, 애국시 등 친필 서예 대업 완성

송원 김재신씨
송원 김재신씨
 음성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난과 역경을 딪고 서예가로 태어나 직지와 구국공신들의 비문 그리고 애국시 등을 친필로 서예화 하면서 서예의 대업을 완성한 서예가 송원 김재신씨.

본보는 서예로 인생을 살아온 송원 김재신씨의 인생과 소망을 담아 보았다.

-편집자 주-



■ 고난과 역경의 시절


송원 김재신씨가 태어난 곳은 충북 음성 음성읍 초천리 1408번지 였다.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는 덕생 초등학교 교문을 나온 것이 전부이고 졸업 후 삼종종부에게 한학 13개월 배운 것이 두 번째의 공부이다.

그의 나이 24세 때 아버님을 돌아가시고 26세에는 어머님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에게 동생 3남매가 있었는데 여동생은 출가시키고 남동생과 슬하의 자식 3남매 모두 일곱 식구를 데리고 30세 되던 해에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서 이것 저것 사업을 하다가 모두 실패를 하고 가산을 탕진해 전셋집 막노동을 해가며 고행의 길을 살아야 했다.

이때 지인의 도움으로 서울시청 직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적은 월급은 삼남매 교육비도 안되었다.

기어코 1987년 되던해 우측폐 기포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

그 후 3차례 폐가 터져 3번 수술을 받았고 결국 4차 기포로 5월 20일날 절제수술을 받게 되었다.

빈곤에서 병고까지 겹쳐 빚을 많이 지게 되어 어려움이 극심한 그때 부인이 한마디 해 주었다. “당신은 한문을 조금 아니까 서예를 좀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

부인의 조언에 새로운 힘을 얻어 동네 서예학원에 입문했다.


■ 서예로 새인생 시작


楷[해]서 隸[예]서를 수년간 배우고 다시 당시 유명했던 창해 김창환 선생님을 찾아가서 行書[행서] 草書[초서]를 배우게 되며 한국서화작가협회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첫 출품해서 특선을 받게 되었다.

1년 후에 스승과 사별을 하게 되지만 그는 그동안 배운 것을 토대로 왕희지, 문징명, 회소, 소동파, 장맹룡 등 중국 선인들의 법첩은 모두 구입하여 해, 행, 초, 예, 전서를 모두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그러나 또다시 설상가상으로 1993년 방광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지금까지도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험한 고갯길만 넘어왔는데 死命[사명]에 이른 그는 여기서 붓을 놓아야 한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병원의 특수촬영에서 의사의 오진으로 결석으로 판명, 그는 다시 살게 되었다.

희망을 본 그는 더욱 열심히 작품 활동을 펼쳤다.

1999년 까지 개인전을 하려고 준비한 작품은 병풍이 22점 그중 5000자가 넘는 병풍이 6점, 액자 족자 소품이 87점 모두 109점이다.

특히, 5000자 이상은 훈민정음전문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금강경 불경3경문합문 팔만대장경 목록 18000자 대형 병풍이 있다.

드디어 1999년 7월 20일-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관에서 전시를 했다.


■ 제3의 삶


서울에서 서예학원을 하려고 했으나 가정형편상 부득이 서울을 떠나게 된 그는 5체천자문을 친필로 제작하고 춘천으로 터전을 옮겨 서예 학원을 개원했다.

아는 사람 아는사람 하나 없고 물설고 산설고 낯설은 춘천땅에서의 삶이 쉽지가 않았지만 그곳의 학교 교장 등 퇴임한 인사들이 글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고 그들의 도움으로 MBC, KBS 등 방송국과 지방 일간지 신문에 오체천자문 전시한 서집이 보도 되었다.

그런데 2000년 12월 또다시 좌측폐가 터지면서 수술을 했고 2001년 3월 4월 연속 수술을 하고 5월에는 결국 서울에서 좌측 폐절제 수술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의 작품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이씨 조선말까지 한시 1100수를 완필했고 팔도 명승시 560여수를 완성했다.

그는 그동안 작품전에서 가작 2회, 특선 4회, 1996년 초대작가 인증서, 1999년에 우수작품상, 동년 12월에 우사문화상, 2000년 8월 한국서화예술대전 초대작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고향 음성으로 돌아오다


그는 춘천에서 개인 전시관을 건립하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무산 되었다.

결국 6년간의 춘천 생활을 청산하고 37년만에 고향인 음성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이 아닌 귀향으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음성읍에 20여평의 서예학원(운암서원 음성읍 읍내리) 등록을 마친 그는 마음을 비우고 고향사람들을 접하던 중 직지를 알게 되었다.

직지 원문구입에 나선 그는 청주 세계직지협회 사무실을 찾아 원문상하권을 구입했고 약1개월간 검토 끝에 인동, 중국 불가의 대승들 164분의 법어를 서예화하게 됐다. 흰천에 규격은 40X170으로 204본을 隸[예]서로 시작 몇본쓴 후에 篆[전]서 체로 모두 완성을 했다. 그러면서 佛字 3000佛을 2009년 11월에 완필을 했다.


■ 서예의 대업


그는 직지를 완성한 후에 다시 대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구국공신들의 비문 대첩비 신도비 애국시 어록비문을 索出[색출]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큰 도서관과 구국공신 비문이나 애국시가 실려있는 책자를 찾았고 비문이 있을만한 지방의 시청이나 군청을 찾았다.

먼저 이순신장군의 비문중 원문 다섯점을 모두 복사해서 받아가지고 왔고 진주 시청에서 김시민 장군 비문3점,  밀양 시청에서 표충사 영당비문,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북관대첩비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비문을 받았다.

또, 독립기념관의 도움으로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중원비, 고려 국도원수 김방경의 묘비, 신도비 비문만 20본, 구국공신 85인의 애국시 어록비문 85점, 안중근의사 여순옥중시 39수를 받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오직 나라를 위한 이순신 장군의 충성심...그는 구국공신들의 비문을 쓰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듯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 상설 전시관 건립의 소망


김재신씨는 “미천한 후손인 김재신이 이렇게 훌륭하신 구국공신들의 금석문을 친필로 서예화 하면서 이분들의 비문이나 애국시, 어록비문 등이 단 한권의 책으로 편찬되어 누구나 쉽게 구입하여 보고 읽을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 우리 후손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분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늘속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너무 안타까운 심정” 이라며“ 이제 고희가 넘은  김재신의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이 훌륭하신 분들의 작품을 모두 전시 해 놓을 수 있는 상설전시관을 건립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전시관을 마련하기에 자력이 전무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 음성이 낳은 서예가 송원 김재신씨.

그는 어는 충 篤志家의 도움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서예계 미래를 위한 서예 애호가들의 끈임없는 관심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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