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지난겨울은 유난히 길고도 험했다. 눈도 많이 내렸고 날카로운 바람에 추위도 매서웠다. 쏟아 붓는 듯한 폭설에 비닐하우스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복숭아의 성목(成木)이 동사(冬死)했고 사과나무는 꽃눈이 얼어서 망가졌단다. 겨우 버텨주고 있는 시설 채소마저 일조량이 부족한 탓에 앉은뱅이 마냥 생육이 멎었다. 농민들의 긴 한숨이 골짜기 골짜기로 넘친다.

지난밤에도 거친 바람소리에 밤새 잠을 설쳤다. 허허로운 벌판을 가로질러 골짜기로 치닫는 바라소리는 지붕이라도 떠이고 갈 기세로 날카로웠다. 처마 끝 차양이 찢겨져 날아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비몽사몽간에 새벽 마당을 서성이며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중 게슴츠레하던 눈이 번쩍 띄어 한쪽에 머물렀다.

밤새 백목련이 수난을 겪은 모양이다. 이제 막 피어오르던 꽃잎이며 나뭇가지가 너부러지듯 즐비하게 내 팽개쳐져 있다. 찢어지고 멍이든 채 잔 바람 앞에서도 맥을 못 추고 나뒹군다. 채 피지 못한 꽃망울들이 부러진 나뭇가지에 매달려 절규하는 듯하다.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에는 종잡을 수 없는 봄바람이 늘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꽃샘추위라며 애교로 받아 넘기고 우윳빛 애기 같은 하얀 목련꽃을 기다린다. 그러나 요즘 들어 겨울과 여름을 넘나드는 듯 한 기후변화는 준비 없는 우리들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봄철 기후변화는 지정학적으로 북쪽인 중국이나 러시아 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와 남쪽 지방인 태평양 유역의 따뜻한 공기가 밀치고 밀리는 세력 다툼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 세력 다툼이 크면 클수록 골은 깊어지고 큰 회오리바람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기압골이다. 그 기압골의 중심부에서 우리는 늘 계절의 어지럼증을 감당하며 살수밖에 없다. 마치 강대국들의 헛기침 한마디에도 걷잡을 수없이 휘둘리는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국제적 현실 같다.

백령도 앞바다의 거친 파도 위에서도 하얀 목련 같은 꽃 봉우리들이 활짝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진하고 천진한 꿈 많은 우리의 아들들이다. 어느 한 순간 불어 닥친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수난 겪은 백목련 꽃처럼 참혹한 모습으로 마흔 여섯 송이의 꽃들은 거친 파도 속에 잠이 들었다. 우직한 아버지처럼 버팀목이었던 천안함은 고목나무 가지 부러지듯 잔등이 부러져 두 동강이가 났다. 운이 좋아 겨우 생명의 끈을 잡은 꽃송이들은 살아 남아있는 것이 죄를 지은 양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한달간을 온 국민들은 애간장을 태웠다. 이제 그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마지막으로 보내야 하는 날이다.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것이다. 대놓고 하소연하고 화풀이 할 곳도 없다. 우리의 아들들을 한 순간 삼켜버린 큰 바람을 몰고 온 기압골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우리는 건국이래 외세의 거센 기압골에 의해 많은 아픔을 겪어 왔다. 언제쯤이면 그 영향에서 벗어 날수 있을지. 내 하나가 나무가 되고 우리 모두는 숲이 되어 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방풍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처 받은 목련 꽃들은 이미 다 져버리고 말았다. 흩어진 꽃잎들을 모아 뿌리 부근에 묻어 주고 다독여 주어야 할까 보다. ‘숭고한 정신’이란 꽃말처럼 밑거름이 되어 더욱 화사하고 고운 목련꽃을 피우라는 소망에서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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