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옥

샛노란 물감을 풀어놓으면 그리 빛깔이 곱고 처연할까. 가을 은행나무 아래에서는 감히 다른 어떤 빛깔도 고개를 내밀어 고운 척 입도 벙긋 못할 것 같은 도도함이다. 좀처럼 떨궈낼것 같지 않던 도도함도 깊어가는 가을바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까.

바람이 세차게 불어 은행나무를 바라보는데 아! 한 잎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텅 빈 하늘처럼 빈가지만 무심하게 흔들고 있다. 그 무심한 흔들림에서 무거운 짐 가득지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려놓은 홀가분한 여유가 느껴진다. 집착에서 막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이른 구도자의 모습도 떠오른다. 나무아래를 보니 온통 눈부신 황금물결이다.

요즘은 은행나무가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보기 드문 귀한 나무였다. 그래서였는지 노란 은행잎이 책갈피 사이 끼어놓을 단풍잎으로는 단연 인기였다. 그날도 누군가 은행잎을 주우러 가자고 했다. 한동네 살아 날마다 붙어 다니던 친구 둘과 나는 은행나무가 있는 친구네 마을로 달려갔다. 아름드리 나무였다. 황홀한 노란빛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나무의 위용에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신성한 성물이라도 되는 양 쭈뼛거리며 은행잎을 주워 책 사이마다 끼워 책을 배불뚝이로 만들었다.

그날 해가 저물도록 은행나무를 맴돌며 놀다 친구네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도 은행나무에 홀렸는지 누구도 집에 알리지 않고 온 걸 걱정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는 걸 남포등 들고 우리를 찾으러온 가족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전화도 없고 전기불도 없던 시절, 남포등 불빛에 비친 식구들의 긴 그림자를 따라 논둑길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던 구불구불하던 그 길이 왜 그리 멀게만 느껴졌는지 은행나무를 원망했다.

당연이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화롯불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 뚝배기와 아랫목 이불속에 식을까 묻어둔 밥사발이 엄마의 꾸중을 대신했다. 그날 엄마 얼굴에 가득담긴 미소는 황금빛 은행잎보다 더 빛이 났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은행나무를 보면 환한 미소를 머금은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화롯불에 보글보글 끓고 있던 못생긴 뚝배기가 떠올라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돌았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기 훨씬 이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다는 은행나무, 그래서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며 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어쩌다 오래된 은행나무와 마주칠 때면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군데군데 옹이가 맺혀 있고, 어떤 나무에는 이끼마저 자라고 있어 오랜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세월의 더께에 마음이 애잔하다. 어쩌면 오랜 시간을 살아온 세월의 무게 때문에 노란 빛이 그리 곱고 처연한지도 모를 일이다. 소슬바람에도 온몸을 흔들어 잎을 떨궈 내는 것은 살아온 긴 시간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나무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을 살다 가지만 얼마나 많은걸 가지려 욕심을 부리며 집착하는가. 때로는 허황된 집착 때문에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맹수들처럼 서로를 할퀴고 상처를 내며 살고 있지 않은가.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한 내 모습이 싫어서일까. 은행나무의 모습을 좋아한다. 눈부시게 아름답던 잎을 미련 없이 떨궈낸 은행나무를 보노라면 집착 없는 그 모습을 닮아보고 싶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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