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나는 비빔밥을 참 좋아한다. 사시사철 언제 먹어도 물리지 않을 만큼 좋지만 여름철에 먹는 비빔밥은 일미중의 일미라 할 수 있다. 빨간 고추장과 녹색채소의 색감이 잘 어우러진 그것은 보는 것 만으로도 입맛이 돋는다. 매콤한 비빔밥 한 그릇에 오이 냉국까지 한 사발 곁들이고 나면 포만감에 행복하고 더위도 잊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비빔밥은 잡곡밥 이라야 제격이다. 보리, 콩, 팥, 감자정도는 기본으로 섞여야 구수한 맛이 감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나물을 골고루 넣으면 좋겠지만 지천인 쌔똥(왕 고들빼기) 몇 잎과 텃밭의 연한 상추, 겉절이 열무김치만 있어도 족하다.

어려서는 큰 바가지에다 썩썩 비벼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아련하지만 지금은 구할 수 조차 없으니 대접 보다는 조금 큰 양푼이면 좋겠다. 밥은 반공기 정도만 우선 넣고 남겨 두는 게 좋다. 욕심이 생겨 이것 저것 넣고 비비다 보면 지나치게 짜거나 매울 때가 있으니 남겨 놓은 반 공기는 간을 맞춰 가며 그때 넣으면 된다. 야채는 손으로 대충 찢어서 넉넉하게 넣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여름철 비빔밥은 풋풋한 야채 맛으로 먹기 때문이다. 짭쪼롬한 된장찌개를 적당히 넣은 후 고추장을 한 숟가락 푹 퍼넣고 감자를 으깨면서 비비면 매콤하며 차분차분한 맛이 식욕을 더욱 당기게 한다.

이렇게 해서 먹는 비빔밥은 언제 먹어도 보약이 따로 없지 싶다. 먹는 모습이 남 보기에는 좀 게걸스럽게 보이는 게 흠이랄 수도 있겠으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먹음직스럽게 보인다며 복 받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어릴 때부터 줄곧 좋아 했던 이 음식을 한때는 점잖지 못한 음식인 것 같아 마음 놓고 먹지 못하고 가슴을 졸인 적이 있다. 한창 멋 부리고 다니던 총각 시절에 나는 그랬다. 서양 문물이 전해 들어 오기 시작하면서 음식문화도 아무런 여과 없이 밀려 들어 오던 때다. 첩첩산골 촌뜨기인 나의 눈에는 분위기부터가 고상한 양식 집에서 칼질 하는 모습은 우아하고 격이 있어 보여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다 못해 햄버거나 토스터 한 조각에 씁쓰레한 커피 잔을 폼 잡으며 기울여야 인간 구실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서양음식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이고 사무적인가. 각자 정해진 그릇에 담아 네 것 내 것이 분명하니 주고 받을 것도 없다. 그러하니 ‘우리는 하나’라는 정이란 있을 수 있겠는가 싶다. 그마저도 이 시대에 와서는 불균형 식품이고 비만의 주범이라 하여 경계의 대상으로 수모를 겪으니 우리의 비빔밥만 못한 것 같다.

밥상 앞에서 정이 난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음식 문화다. 뚝배기 한 그릇에 찌개를 끓여 놓고 서로가 스스럼 없이 수저를 적시기도 하며 반찬도 나누고 가릴 것 없이 먹고 싶은 만큼 먹으면 된다. 모자라면 덜어 주고 별미라도 있으면 서로 밀어 주며 권하기도 하고 양보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족을 식구라고 하는 것이다. 한 그릇에 같이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비빔밥 같은 식구들이다. 아이들이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까닭에 어쩌다 모이면 만져야 하고 비벼야 산다.

갖가지 재료들이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비빔밥의 맛을 이뤄 내 듯이 우리 사회도 어우러지고 뭉쳐져서 사람 속에서 사람 사는 멋과 맛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잘못했다. 아이들을 한 두셋은 더 둘걸.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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