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명화

음식을 넣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더 들어 갈 공간이 없다. 이사 올 때만해도 넉넉했던 것이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됐다. 식구도 많지 않은데 무엇을 채워 넣었는지 복잡한 냉장고 속을 보자니 머리가 뒤숭숭하다.

올 봄에 냉장고 없이 살아 본 적이 있다. 그 때 가졌던 마음가짐이 새삼스럽다. 새집으로 들어 갈 시기가 맞지 않아서 모든 짐을 이삿짐센터에 맡겨두고 원룸에서 한 달 동안 지내게 되었다. 갈아입을 옷가지 한두 벌과 밥 해먹을 최소한의 그릇만 가지고 갔었다. 그런데도 큰 불편 없이 오히려 이상한 충만감을 느끼기도 했다.

4월이라 하지만 때 이른 더위로 낮에는 반소매 옷을 입을 정도였다. 낮에는 에어컨을 틀고, 밤에는 보일러를 돌려야 했다. 원룸에는 T.V와 냉장고만 없고 거의 다 갖춰져 있었다. T.V 시청은 즐겨 하지 않으니까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먹는 것이 문제였다. 저녁밥은 사서 먹든지 대충 때우면 되지만, 어머님의 아침 식사는 챙겨 드려야 했다. 국이나 찌개를 끓이고, 반찬 한두 가지와 먹었다. 하지만 아침에 한 반찬이 변해서 저녁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베란다 창문에 올려놓았다가 찬물에 담가 놓아도 보았다. 모두가 허사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작은 아이스박스를 하나 사서 쉽게 변하는 반찬을 넣고, 통조림 반찬을 사다 먹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적응해 가면 최소한의 물질을 가지고도 마음은 얼마든지 넉넉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여름에 예순이 넘은 큰올케 언니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상가 주택에 살다가 마당이 있는 주택으로 이사 갔다고 해서 언니와 함께 갔었다. 명륜동 작은 한옥 이었다. 아담한 마당과 담 옆으로 화단도 있었다.

시골의 앞마당처럼 상추도 심어져 있었고, 봉숭아꽃이 우리를 반겨줬다. 작지만 손질이 잘된 반질반질한 마루도 있었다. 마루로 올라가는 양쪽 기둥은 내 양팔로도 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허름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듯 했다. 명륜동에는 이런 고택이 많았는데 거의 헐려서 몇 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기억자로 된 방 두개와 부엌을 개조해서 만든 주방이 있었다. 그중 조금 크다고 하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옛날 T.V가 작은 문갑위에 덜렁 놓여 있고, 한쪽짜리 이불장 하나가 방안 살림의 전부였다. 주방 살림도 나을 것이 없었다. 가전제품 이라고는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언니와 나는 비난 섞인 말투로 “그 돈 다 벌어서 뭐하려고 이렇게 살아요?” 했다. 올케언니의 대답이 우리를 머쓱하게 했다. “우린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데” 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엔 궁색한 구석을 찾아 볼 수가 없고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올케언니는 혜화동에 상가건물도 한 채 있고, 경기도 파주에는 많은 땅이 있다. 그 언니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방식대로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전원주택으로 이사 온 이유도 내 방식대로 살고 싶어서다. 남들 흉내 내지 않고 분수껏 알차게 살기위해서다. 휴일이면 밭에서 땀 흘리며 노동의 기쁨을 누리고 탁 트인 마당에서 별밤을 만나는 것, 풀벌레 소리를 벗 삼아 자연인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야채는 텃밭에 길러서 제철 야채를 먹고, 육류와 가공식품을 가능하면 멀리하고 자연과 가까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보고자 함이다. 이렇게 몇 달을 살아보니 불편한 점이 많지만 적응 되어가는 과정에도 기쁨은 있다.

흙과 친해지기, 생명 가진 모든 미물들과도 어울려 살기. 모아서 쌓아두기 보다는 덜어내고 나누며 살기, 사람은 애초부터 그런 존재임을 알아가면서 더불어 산다면 그런대로 우리 노후는 보람 있지 않을까. 우선 냉장고 속부터 덜어내야겠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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