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진

겨울 초입인데 난 벌써 봄을 기다리고 있다. 추위를 무척이나 많이 타는 나에게 남편은 “전생에 아프리카 원시 부족민 공주였나 보다”라고 놀린다.

바쁜 출근 시간 자동차 앞 유리에 끼인 성에를 제거한다는 것이 손도 시렵고 몹시도 성가신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할 때는 한결 같이 남편이 일찍 나가 시동을 걸어 줬기 때문에 몰랐던 일이다. 그런데 같이 출근을 하면서 성에를 벗겨 낸다는 게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늘따라 남편의 그 배려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며칠 전 또 한 번의 놀라운 일을 접했다. 내 차는 주차장 서쪽 끝에, 남편 차는 주차장 동쪽 끝에 세워 두었다. 그런데 내 차는 성에가 끼어 제거기로 긁어내야 했는데 남편 차는 앞 윈도우 브러쉬를 몇 번 왔다 갔다 하자 이내녹아 내렸다. 해님도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데 동쪽으로 향해 있는 몇 미터가 그런 큰 차이를 보이다니 놀라웠다.

그러니 나도 마흔의 중반을 살아오면서 음으로 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뒤돌아보니 많은 세월 그 미묘한 햇볕의 차이가 나를 이렇게 살아오게 하는 힘은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같이 교정을 걸었던 친구들, 대학진학 실패 때 같이 술을 마시며 위로해 주었던 친구, 첫사랑과 헤어진 뒤 나쁜 놈이라고 같이 욕해주었던 친구, 결혼식 때 축하해 주었던 하객들, 첫아이의 돌잔치에 참석해 준분들, 내 출판기념식장을 가득 메워준 사람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아버지 장례에 참석해준 문우들 등등,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고 많은 사건들이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사랑으로 자랐고, 힘을 얻었고, 오늘의 내가 있음을 알았다.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 일상들 모두가 이런 사랑으로 엮어가고 있었음을 왜 몰랐을까?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이런 것이다. 먹거나 자거나,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친목회나 송별연을 베풀고 참석도 해본다. 두 주일에 한 번씩 이발도 하고 생각나면 화분에 물도 준다”라고 한 임어당(林語當)의 글을 읽고‘천하에 임어당이...’ 하고 실망을 했었는데 오늘 난 임어당의 인생철학을 100% 이해할 것 같은 아침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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