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순

남편의 머리에는 서리가 잔뜩 내려앉았다. 차라리 내 머리에도 흰 머리가 빨리 생겼으면 할 때가 있다. 직장을 다니며 복숭아 재배를 하는 남편에겐 밭이 아내인 가보다. 주말과 평일 이른 새벽에 일하는 날이 많아서일까. 슬그머니 나를 찾는 것은 소금기 맺히고 흙 묻은 작업복뿐이다.

농사일이란 1년이 매일 바쁘다. 일이 서툰 나로서는 복숭아일도 힘에 겨운데 남편은 사과나무까지 심어놓고 수확을 위해 정성을 쏟는다. 시아버님이 평생을 밭에서 사셨듯이 남편도 그날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일찍 일어나볼까 움직여도 눈은 매일 무겁다. 그래서 새벽잠이 많은 나는 미안한 날이 참 많다. 가끔은 살이 빠져서 아들 속옷인줄도 모르고 입은 남편을 놀리기도 했지만 머리숱이 점점 성그러지는 모습에 난 어떤 존재였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도 여름이면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편이 새벽에 복숭아를 따놓고 출근하면 난 아이들 셋 등교시키고 포장작업과 배송작업으로 정신이 없다.

남편은 여름내 새벽이슬 맞으며 일하고 겨울이 되면 비염과 기침이 심하다. 피를 맑게 해주고 비염에 효과가 좋다하여 수세미 모종을 심었다. 사람의 몸과 수분 함유량이 같고 식이섬유가 풍부한 청정식물이다. 손바닥 모양의 덩굴손은 썰렁했던 담 위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다. 섶을 세워주니 어머님이 심어 놓은 콩 줄기 하고 자리다툼을 한다. 제법 노란 꽃을 피우더니 꽃이 지는 자리마다 열매가 달렸다. 자리 내어주고 열매 맺힐 때를 기다리기만 했는데 저 혼자 담 위를 넘나드는 모습이 기특했다. 씨가 생기기 전에 설탕에 재워야 약이 된다기에 수세미 효소를 담그며 남편마음을 넘보려 한다.

두 손과 마음을 모아본다. 아사녀가 아사달이 그리워 그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나 또한 마음으로 쌓은 탑을 돌며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이들 부부는 옛 백제 부여에 살고 있었다. 석공으로 유명했던 아사달은 신라 김대성의 부탁으로 긴 외출을 준비해야 했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삼층 석탑을 세우기 위해 길을 떠나는 그의 모습엔 아내와의 이별을 예감이라도 한 듯 미안함이 가득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함이었기에 탑이 완성되기 까지는 외출도 삼가야 했고 외부사람의 접근도 피해야 했다. 그리움과 애틋함이 사로잡는 밤은 길기도 했나보다. 아사녀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길을 나섰다. 지척에 있는 남편을 만나지 못하면서도 두 손 마주 잡고 보금자리로 향할 순간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승려의 말에 한 없이 그리움만 쏟아 내는 그 모습이 내 마음에 파고든다.

오늘도 난 무영탑을 돌며 마음의 연못을 만들고 있다. 아사달이 아사녀를 찾다가 새겨 놓은 석불좌상이 되어 남편의 마음에 비춰지고 싶어서일까. 우리아이들 손을 잡고 그 탑을 돌고 싶다. 비가 내리고 물기를 머금은 수세미 넝쿨 줄기는 낡은 담을 꼭 감싸 안고 있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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