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래수

읍내까지는 걸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시내버스도 다니지만 자동차로 다니는 것이 사치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가다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도 동승시켜 가면 조금은 덜 사치한 기분이다. 오늘도 노인 두 분을 태워 드렸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천원을 주기에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나는 버스 기다리는 사람이나 걸어가는 사람들을 잘 태워주는 편이다. 아내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자칫 실수하여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 거냐며 동네사람들을 경운기에 태우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비용을 물어주느라 살림이 거덜 난 사람의 일과, 불량청년을 태워주다 강도당한 이야기를 해주고는 태워주더라도 조심하라고 하는 아내의 말에 일리는 있다.

내가 사람들을 태워주는데는 천원의 버스비 때문은 아니다. 지난날 나를 변화 시킨 한분의 고마운 배려를 잊지 않으려 해서다. 세상살이의 기본적 도리와 더불어 사는 삶과 약하고 낮은 자를 배려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 그 분 때문이다. 당시 그 분이 내게 베풀어 주신 온정은 지금도 내게 감동으로 남아있다.

젊은 시절 공무원 시험 보러간다고 밤잠 설친 탓에 버스시간 놓치고 발을 동동 구르던 때가 있었다. 시골이라 택시가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날따라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마저 불어 을씨년스런 날씨인지라, 차들도 별로 없어 편승하기조차 어려웠다. 몇 대의 지나가는 차를 세워보았지만 그냥 지나치는 차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때 저만치서 달려오는 지프형 승용차 한 대를 우산대로 가로막으며 세웠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지 태워 달라고 떼를 썼다. 신사 한분이 내려서 나를 안쪽 뒷자리로 태워주면서 시험 보러 가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손에든 책받침을 보니 그런 것 같더라, 공부는 많이 하였느냐고 물으셨다.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다고 하자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다.

도중에 운전기사가 이차가 어떤 차인지 알고 세웠느냐기에 그냥 급한 김에 그만. 하면서 머리만 긁적이자, 법원 판사님의 관용차이고 앞자리에 앉은 분이 판사님이라고 하는 말에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멎은 것 같아 당장 내리겠다고 했다. 당시 판사라고 하면 군수, 경찰서장도 그 앞에선 겸손해진다던 그런 분의 차를 가로막아 세워서 탔으니 불경도 언어도단이었다.

빙그레 웃으시던 판사님께서 “그렇게 용기와 패기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공무원을 하겠는가? 차를 세울 때의 그 가상한 용기는 다 어디 갔으며 포기가 그렇게 빨라서야 공무원이 된다한들 소신 있게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다급한 일이 생기면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어렵게 생각 말고 안심하고 가자”는 말씀에 눈가에 이슬이 맺히었다.

시험장까지 태워다 주셨다. 감사하다며 백 원짜리 한 장을 운전사에게 건넸더니 한 번 더 빙긋 웃으시더니 예의도 갖출 줄 아는 청년이라면서 시험 잘 보라는 격려와 함께 천원을 쥐어주시면서 시험마치고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라는 것이다.

그때 그 천원은 내게는 거액의 돈이라 사양했지만 호의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예이라기에 염치없이 받았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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