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여기는 친구네 비닐하우스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연초록의 실파와 부추 모가 가지런히 누워있다. 한 낮이라 그런지 하우스안의 온도는 초여름을 방불케 했다. 시원스레 물을 뿌려주고 밖으로 나오니 기온이 하우스안과 전혀 다르다.

친구 차를 타고 달리면서 바라본 바깥풍경은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샛노란 개나리를 보며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친구는 매일 이 길을 몇 번씩 다니면서도 창밖의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며 즐거운 듯 이야기를 한다.

살펴보아도 특별한 풍경이 아니건만 감성 깊은 친구는 무엇이든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관찰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부지런한 친구는 봄이 오면 온갖 채소들의 모종을 사서 텃밭에 심는다. 각기 다른 채소의 이름을 대면서 그 특징과 상태를 설명한다.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초등학교 1학년 교사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다른 직업에 종사하던 친구네는 올해부터 부추와 파 농사를 짓게 되면서,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새싹들이 대견하다고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한다. 적당한 수분과 온도를 맞추어주면 크는 것이라고 대꾸하면 정색을 하고 그게 아니라며 또다시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자식 자랑에 빠진 팔불출 엄마 같다.

모든 일에 긍정적인 친구를 만난 것이 20년을 훌쩍 넘었다. 소박하고 순수해서 요즘여자 같지 않다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나지만 그 친구 앞에서는 남편 흉까지 술술 나온다. 매일 아침 늦둥이 아들을 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짬을 내서 우리집에 들르곤 한다. 앉자마자 초등학교 수학이 어려워서 가르치기 힘들다는 푸념부터 국어책은 동화책 수준이라 재미있다는 얘기까지, 초등학교 교과서 전문가가 되어 열심히 설명을 한다. 바쁜 가운데도 짬을 내어 아들 공부를 봐주는 친구는 자식 키우는 일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딸 셋을 낳고 늦게 얻은 친구아들 덕에 나 역시 덩달아 초등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어 방송이나 신문기사에서 초등소리만 나와도 신경이 모아진다.

어느새 승용차는 친구 남편이 일하고 있는 밭으로 향하고 있었다. 밭에서 일하는 친구남편을 보면 성격대로 일한다는 표현이 옳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밭 귀퉁이에 쓰레기봉투를 걸어놓고 휴지 한 장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린다.

풀과 돌로 가득 찼던 묵정밭을 기름기가 흐르도록 가꾸어놓은 밭을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조금 까다로운 성격의 남편과 사이좋게 잘사는 친구의 비결은 착해서라기보다 긍정적인데 있는 것 같다.

중용에는 “정답은 아니지만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다소 정신에도 비중을 두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한다.”고 적혀있다. 흔히 현대인은 건강하고 돈이 많으며 학식 또는 학벌이 좋은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황진이는 재물이나 학식에 행복이 들어있지 않다는 의미심상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글들을 접할 때마다 친구 부부가 떠오른다.

나른한 오후 책에 수면제를 바르고 있을 즈음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약효가 떨어진 책을 치우고 전화를 받으니 명랑한 친구의 목소리가 날아온다. 병아리 새 식구가 여덟 마리로 늘어났다며 좋아한다. 병아리 집을 넓게 지어야겠다는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상관없다는 듯 기쁨이 전화선으로 넘쳐 흘러온다. 병아리가 너무 예뻐서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는 목소리에서 중용의 행복 론을 읽는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저작권자 © 음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