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숙

해외여행 길에 오를 때면 항상 여보 셋을 챙겨 떠나야 한다.

여행 경비부터 수속 절차와 보따리, 심지어 여권 만료일도 남편은 모른다. 다만 여행 날짜가 잡혔다고 하면 "나도 갈겨!" 한 마디면 그만이다. 혼자 떠나면 간편한 짐을 꾸릴 수도 있는데 꼭 따라 붙는 남편 때문에 두 배가 힘든 게 아니라 세 배가 힘이 든다.

여행 경비도 무리이거니와 남편과 나의 여보(여권과 보따리), 남편의 여보와 여보(남편)의 보약(소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챙겨 가야 한다.

싱가포르 갔을 때의 일이다. 처음 해외여행이라 소주를 챙겨 가지 않았다. 현지에서는 소주 한 병에 이만 오천 원, 우리나라보다 30배나 비쌌다. 남편은 하루 세 병씩 사서 일행들과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남편은 우리나라의 보약 두 제 값을 술값으로 지불했고 나는 그게 아까워 기념품을 한 개도 사지 못하고 괴로운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남편에게 소주를 권할 때면 "여보! 보약 마셔." 한다.

지난번 서유럽 여행 때는 출발하기 전날 밤에 한잠도 못 잤다. 열흘 동안 여행하려면 의복도 사계절별로 챙겨야 하고 밑반찬도 문제지만 남편의 보약도 만만찮은 짐이다. 거기다가 혼자 지낼 큰 아들의 의식주까지 준비해 놓고 가려니 떠나기 전에 지쳐 버렸다.

열한 시간을 달려 런던 공항에 내렸을 땐,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남편에게 의지해 호텔에 도착한 나는 씻지도 못하고 골아 떨어졌다. 안내원이 방문해 지금부터 주무시면 여덟 시간이나 늦은 시차적응에 실패한다고 이르는 소리만 아련하게 들려 왔을 뿐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현지시간으로 밤 열한시다. 언제 그랬냐 싶게 몸은 개운했다. 안내원의 말이 떠올랐지만 목욕을 하고 나서 잠을 청해 보기로 하고, 사워기를 틀어 머리를 감는데, 물이 바닥에 고이는 것이다.

하수구를 아무리 찾아도 없다. 부자 나라라 센서로 물이 천천히 스며드는가 보다 생각하고 샤워도 바닥에서 마쳤는데 물이 발목까지 차올라 문지방에 찰랑거린다.

전화기를 들어도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목욕탕 바닥에 하수구가 어디 있느냐고 소리 질러도 못 알아듣긴 그 쪽도 마찬가지다.

내 목소리에 남편이 깼다. 욕실에 하수구 좀 찾아보라고 하니까 아까 안내원이 욕실 바닥에 하수구 없다고 물 흘리지 말라며 물 흘리면 벌금이 우리나라 돈으로 삼십만 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편은 밤참으로 먹은 컵라면 통으로 물을 퍼서 세면대에 붓고 나는 수건으로 적셔서 짜내느라 또 밤을 새웠다. 남편이 있어 벌금을 물지 않은 안도감인지 시차적 적응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여행 첫날 밤 사건을 알지 못하는 일행들은 사이좋은 부부라고 부러워했다.

앞으로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불평불만 없이 세 여보를 챙길 것이다.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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