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노인회 음성군지회 이기준회장 특별기고 (7)

용산리 저수지 축조 철저한 감시체계로 견고성 완비
읍내리,평곡리 주민들 저수지 축조는 숙원

음성 읍내리의 수원은 용산천이다.
용산리의 땅은 자갈이 많아 장마 때는 수해가 심하고 가뭄에는 건천 이다 보니 하류인 읍내리 인들 물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남천동 부근과 경찰서 부근 논 작인들의 수원의 젓줄은 복지회관 앞 하천의 보(洑)다 열흘 이상만 가물면 하천의 물이 마르니 농민들은 날마다 보를 파는 것이 일과였다.
(저수지를 막은 후로는 보를 파지 않아도 항상 물은 내려간다)
그러기에 용산리, 읍내리, 평곡리 주민들은 용산리 저수지를 막는 것이 숙원 사업이었다.
특히 6.25사변이후부터 여러 차례 저수지를 막아 줄 것을 관계 요로에 진정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러다 천우신조하게도 때가 왔다. 공화당 정권시절 이 고장 출신 오원선 박사가 보건사회부 장관이 되면서 그분의 배려로 미국 원조 물자 4백80의2호인 밀가루 원조 물자로 용산 저수지를 막게 됐다. 그 사업이 시작에서부터 완공되기까지 어려웠던 사연을 회고해 본다.
당시 소문에는 밀가루가 약 5만포대가 들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았다.
읍사무소에서는 용산리, 읍내리, 평곡리 구역에서 30여명에 추진위원을 농민 중에서 위촉했는데 나도 그중의 한사람으로 끼었으나 60세이상 어른들이고 50세 미만은 나와 오창근씨다.
1968년 첫 회의소집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회의 전날 서울에 부득이 한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그날 새벽 5시차를 탔다.

□밀가루 배정

비포장 길에 차가 달렸지만 시간이 늦었다.
회의장에 들어가 뒷전에 앉아서 보니 회의는 마무리 단계였다.
군 당국의 형편대로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는 모양이다.
나는 읍장에게 늦게와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내용을 모르니 사업계획을 다시 설명해 주기를 요청했다.
당시 읍장 염재희씨는 군에서 임석한 김영수 사회계장에게 다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계장의 설명을 요약하면 오 장관의 특별 배려로 밀가루 만포대가 배정됐는데 제1후보지(현재 저수지)와 제2후보지(봉학골 삼림욕장과 예비군 훈련소)중 제2후보지를 막으면 밀가루 배정받은 일만포대를 가지고 금년중에 공사를 마무리 지울 수 있고 제1후보지를 택할 경우 공사 기간도 3년, 4년이 걸릴것이고 만약 오장관이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경우 공사가 중단될 염려가 있으니 제2후보지로 하는 것이 완벽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나는 제2후보지에 막는 것은 이 지방에서 요구되는 물을 저수 할수 없으니 이를 반대하며 예를 들어 용원저수지에 경우 왜정때 일본 놈들이 막다가 망해서 중단했어도 우리나라 정부가 완공 시켰다.
우리도 제일 후보지를 막다가 공화당 정권이 망한다는 말을 하느냐고 말하기에 그 말이 거슬리면 망한다는 말은 취소한다고 말을 맺고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우한 후보지를 선택하기 위하여 무기명 비밀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한바 이의가 없어 투표한 결과 제1후보지가 36표로 전원 지지하여 결정 되었다.
그러나 시공과정이 문제였다.
이 사업은 빈민 구제용 사업으로서 1인당 하루 임금은 밀가루 3.6kg 규정되여 있어 읍장이 사업주로서 직영하며 타인에게 청부를 주지 못하며 인력외의 장비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수지공사 현장에는 청주에서 온 곽한제 라는 사장이 나타나 청주에서 온 일당들이 주도권을 잡고 착공을 했으며 날이 갈수록 청부업자 같은 느낌과 그런 소문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읍장 염재희씨를 찾아가 곽사장 에게 청부를 준 것을 책망했다. 그러나 읍장님은 헛소문이라고 부인했다.
그후 날이 갈수록 청부업자라는 인상이 감지됐다.
나느 청부를 주었다고 누구를 탓하기 보다도 이일이 위법임으로 권력기관 등등 입을 막자니 밀가루는 뇌물로 들어가고 업자도 먹어야 하고 심지어는 술집에 기생도 먹는다는 소문이었다.
밀가루는 옆으로 새나가고 결국은 부실공사가 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소문으로 나돌았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 도처에서 밀가루 공사가 이루어 졌고 부정사건은 사방에서 일어나 신문에 보도 되었다.
그럼으로 용산리 공사라고 해서 예외 일수는 없었다. 자유당시절 전라도의 효기리 저수지가 장마날도 아닌 맑은 날씨에 밤에 둑이 터져서 읍내 장터가를 싹 쓸어 버렸던 악몽이 머리에 스쳐갔다.
용산저수지가 부실공사가 된다면 용산리, 읍내리, 평곡리 1부까지 인명은 물론이요, 막대한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하니 잠이 안왔다.
그로부터 나혼자 공사현장에 가서 매일 나오는 인부의 숫자를 파악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밀가루로 임금을 내어 주었다.

□읍사무소 소장차고는 당시 밀가루 창고

현재 읍사무소앞에 소방차고가 당시 밀가루창고 였다. 나는 일주일간의 인부숫자와 3.6kg을 계산하고 창고문에 가서 밀가루 나가는 숫자와 재고를 확인하는 일을 매주 2개월동안 계속 했다. 그러나 곽사장은 친절을 베풀려고 나에게 접근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반면에 테러를 당할 조짐도 보였다. 인부수가 점점 많아졌다.
나 혼자 감독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뿐아니라 나의 과수원등 내 집일이 너무 바빴다.
나는 읍장님에게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는 감독 3인을 두도록 요청한바 읍장이 급료를 책임지는 전제아래 내가 믿을수 있는 읍내리 김태섭, 이호영, 용산리 성대환 3인을 공사현장에 나와 내가 하던 일을 대신하게 했다.
그리고 간간이 나도 나가 같이 했다.
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간 성대환씨는 정확한 인부 수와 공사 진행사항을 보고 하는데 두분 감독은 적당히 인원보고를 했다.
밀가루 지급 일에는 바빠도 나는 창고문은 지켰다.
인부들이 받아가는 밀가루 숫자를 맞추어보니 성대환씨가 파악한 숫자가 재고와 맞아 들어갔다. 이일이 확인되면서 그 두분에게는 감독을 해임하고 읍장에게는 2인분의 급료지금을 중지하고 신고했다.
그로부터 성대환씨와 내가 둘이서 계속했다.
1969년 봄 어느날 저수지 공사가 돌연 중단 됐다. 곽사장이 춘궁기에 빈민들의 심리를 이용코져 한 모양이었다.
인부들 소문에 의하면 이기준이가 너무 까다로워서 일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인부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이기준에게 원성이 돌아가도록 쇼를 했지만 인부 대부분이 용산리 사람이 많았다.
읍내리와 외지인부도 있었지만 인부들도 주민인지라 내가 잘못한 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지역을 위하여 잘한다는 칭찬의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곽사장은 15일만에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일후 밀가루 지급일이 되었다.
이날도 창고를 지키는 일은 계속 했다. 이때 읍사무소 사회계원 현도홍(나와는 수봉학교 26회 동기생)이 나에게 다가와 네가 경찰관이냐, 신문기자냐, 감독관이냐 무슨 권리로 창고를 지키느냐고 고함을 치며 창고에서 나가라고 떠밀었다.
나는 직책이나 권리는 없어도 관계당국의 부정을 막고 부실공사를 방지하여 장차 이지역 주민들의 안전을 위하는 대의 명분으로 하는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다음날인 1970년 1월26일 나는 대전에 갔다.
대전일보사를 심방하여 사장에게 인사하고 음성의 대전일보지국 설치신청서를 설치하고 보증금을 납부하고 신문 30부를 계약하고 기자 신분증을 발급 받았다.
다음주 밀가루 지급일었다. 창고에 들어서자 현도홍씨가 너 왜 또 왔느냐고 거칠게 나왔다.
나는 기장증을 현씨 코앞에 드려대고 기자라고 하며 이거 안보여 하자 그후로는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약 한달후에 만나자고 기별을 했다. 나느 단둘이 만났다.
읍장님은 이제 일년이상 감독을 했으니 감독하는 것을 중지해 달라며 목 메인 소리로 호소했다. 이때 공사는 3분의 1밖에 추진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거절 했다.
내가 손을 떼는 날 부실공사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인데 장차 불행한 일이 있어도 읍장님네 동네 약물재는 수해가 없을 터이니 안심할지 모르나 나는 용산리, 읍내리 주민드르이 파수꾼이야, 내 양심으로는 중지 할수 없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시체계 강화

나는 성대환씨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사 현장엣 점토 질층에 돌이나 나무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했고 점토 다지는 일에도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공사로 인해서 보수없는 파수꾼이 유관기관 당국들의 미움을 받아가며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공정도 반은 추진된 것 같았다. 어느날 친구들과 같이 술집에 갔다.(당시 수정각)술을 먹다가 화장실에 가게 되었다.
우연히도 오덕영씨(당시 공화당 음성군 당부조직부장, 수봉학교 26회 동기생)을 만났다.
만취상태에서 나를 향하여 너 유치장에 잡아넣을 거야 라고 한다.
나는 화 김에 이놈아 그런 힘이 있거든 네 맘대로 해보라고 반박했다. 그로부터 약1주일 후에 낯선 젊은 사람이 찾아와 인사를 하며, 음성경찰서 수사과 형사라며 신분증을 제시한다.
내가 수사과 형사라면 다 아는데 하니까 5일전에 청주서에서 온 김모형사라고 하며, 6년 전에 낙엽송 10여주를 무허가로 벌체 한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시인했다. 그는 그 사건을 조사코저 합니다. 서에 같이 가주십시오 라고 한다.
그러면 영장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영장을 가지고 또 한번 오시오 하고 연행을 거부했다.
김형사는 난처한 모습으로 꼭 가셔야 합니다 하며 재촉을 한다.
6년전으로 소급하여 말하면 당시 유용기 군수가 농가 특수작목으로 양송이를 장려하기 위하여 대만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군내 농가에게 양송이 재배를 권장했다.
그러나 재배사가 없었다. 이때 군수는 재배사를 짓기 위하여 필요한 재목을 무조건 베어 쓰라고 직권으로서 권장했다.
군내 약 100호가 되는 농민들은 허가 없이 벌채 하여 재배사를 지었다.
나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6년이 지난 일을 미우니까 그 일을 유독 나에게만 문책을 하는 것이다. 그당시 아무리 군수특별조치라 하더라도 불법이었기에 당초부터 양송이를 재배할 형편이 안 되어 우리 과수원에 사는 이종형님 정태희씨에게 일감을 주기 위하여 지었다.
허가없이 벌채한 것이 꺼림측하여 당시 산림과에 들어가 자청하여 정태희씨 이름으로 사건을 만들어 5천원의 과태료를 물었다)
김형사는 내가 꼭 가야 할 형편을 이야기 한다. 사건당시 음성군 산림과장 박모씨가 지금 제천시 산림과장으로 재직중인데 지금 음성서에 증인으로 출두하고 있어서 이 선생님이 가셔야 대질심문을 하고 박 과장은 배임죄로 입건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김 형사에게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아느냐고 물었다. 관계당국자들이 지역사회를 위하여 희생하는 사람에게 표창은 못할 망정 교묘한 방법으로 보복을 하려는 것이 정치행패라고 질책했다.
김 형사에게 여차 여차 한일이 있어 마무리 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다시 조사해서 아니면 영장을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그후로는 소식이 없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여전히 나는 저수지 공사장에 가는 도중 곽 사장을 만났다.
그는 쫓아와서 내 손을 잡더니 자기가 기숙한 처소로 가서 막걸리 한잔하자고 한사코 권했다. 인정에 못 이겨 따라 갔더니 열무김치에 막걸리 1되가 들어왔다.
술 한잔 마시다 보니 곽사장 두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 방바닥을 적셨다.
그러더니 엉엉 소리를 내며 울다가 그 뜨거운 여름에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방바닥에 업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울더니 일어나 앉으며 나는 이선생님 때문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공사를 얻어내느라고 3백만원을 들어 밀었는데 이선생님이 너무나 경우가 밝게 감시를 하니 본전은커녕 이자가 늘어가 처자식 데리고 깡통을 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공사를 더 할 힘도 없고 철수를 하겠다며 또 울기 시작했다.
애당초 내가 손을 댄 것은 관청이나 곽사장이 미워서가 아니다.
이 지역의 안전을 위한 것 뿐이었다. 나는 곽사장을 위로하고 공사현장을 같이 둘러 보자고 하여 몇 년만에 처음으로 두 사람이 공사가 진척된 공정을 살펴보았다.
공정이 70%가 되어 있다는데는 의견이 일치했고 제방도 담수의 만수면 위치 예정 지점은 지났다. 부실공사는 면했다고 생각이 들고 벌어먹겠다고 내고장에 온 사람이 망해서 갔다면 이 고장의 인심이 박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나는 곽사장과 이렇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다음날부터 공사장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70%공정이 되었기로 이만하면 염려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후 담수하고 몇 년동안 만수가 되어 농민들이 혜택을 보았다.
그러던중 어느날 장마 끝에 날씨도 개였는데 저수지 뚝방 일부에서 조금씩 물이 새어나왔다. 본 공사시 배수하던 자리 최종물막이 공사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관계당국에서는 주민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 사이렌을 울렸다.
사이렌 소리에 놀랜 용산리, 읍내리 주민들은 모두가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진 일도 있었다.
그당시 군 당국에서는 저수지 둑 위험 지점에 구라우찡으로 보수 공사를 하여 현재까지 안심하고 지내왔다.
1988년 여름에 일이다.
용산리 저수지 공사가 끝난지도 16년이 되었다. 그지간 저수지 덕으로 농민들은 해마다 농사를 잘 지었다.
1988년 가뭄이 심했다. 다른 논에는 모를 못 심었는데 저수지 밑에는 벼가 잘 자라고 풍년이 든 기분이었다.
그러므로 오장관의 은혜를 피부로 느꼈는지 사방에서 오장관 공적비를 세워 주자는 말은 많이 하는데 서두르는 사람이 없었다.

□용산리 주민 총회

나는 우선 용산리 주민 총회를 열었다.
농민이나 비 농민이나 100%찬성하였다. 그 다음 읍내리, 평곡리 농민 대표회의를 한바 모두 찬성함으로 1988년8월 오원성 장관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금을 모금한바 각 기관사회단체 38개소에서 1백79만원 농민 및 일반주민 2백6십2만9천원으로 합게가 4백4십1만9천원이 모금되여 1988년 12월28일 용산 저수지 도로변에 기관사회 단체장님들과 주민 1백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원선 장관의 고마움을 느끼면서 공적비 제막식을 성대히 치렀다.
나는 자유당 시대부터 역대 정군들을 다 겪었지만 가섭산 채석장을 거울삼아 향토는 주민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월이 30년이 흐르다 보니 저수지를 막는데 공이 많으신 분들중 작고하신 분도 많아 아쉽기만 하다.
인생은 짧고 역사는 길다.
이 고장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주민이라면 지역사회를 위하고 후손들을 위하여 공익사업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누구의 눈치볼 것 없이 과감하게 앞장서서 바로잡는 것이 인간이 사는 본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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