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숙

달포 전, 향기로운 포도원에서 솎아 내는 포도를 얻어 왔다. 색이랑 모양새가 보석중의 보석 알이 굵은 블루 사파이어를 연상하게 한다. 너무 황홀해서 하루 동안 만져만 보다가 유리 항아리에 포도와 황설탕을 켜켜이 얹어 면 헝겊으로 덮고 뚜껑을 슬쩍 올려놓았다.

눈이 부실만큼 새파란 포도와 노란 설탕의 색의 조화가 감미롭다. 쳐다보기만 해도 눈의 피로가 가시고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이 어떤 것이란 걸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 동안 궂은 날씨에도 유리 항아리 들여다보는 재미로 살아왔다.

포도 알이 차츰 누렇게 변해 가더니, 마치 고단함 속에서도 눈웃음이 일품인 포도원 주인을 닮은 듯 한 향기가 집안에 가득 퍼진다. 처음엔 시각적인 즐거움으로 나를 유혹하더니 이번엔 후각적인 자극으로 나를 매료 시킨다. 이 향기도 일주일이면 가실 텐데 포도원 주인에게 전해 주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유리항아리를 안고 포도원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남편이 들어 올 때마다 "햐- 냄새 좋다." 코를 킁킁 거린다. 35년을 동고동락 하면서 여간한 일에는 가타부타 표현을 하지 않던 사람인데 이렇게 좋아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남편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적인 언행에 여생을 같이 해도 좋을 긴 행복감에 젖는다.

옛날에는 애들이 공부를 잘한다거나 돈 생기는 일 아니면 무심히 지나치고 감동을 받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자연 발효 되어 가는지 이젠 자질구레한 일에 감동을 자주 받고 내 가슴속에 오래 남아 있다. 작은 일에 자주 감동하고 긴 행복감으로 이어 갈 수 있다면 노년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발효초 담그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만다. 누구를 미워한다거나 화가 났을 때 담그면 정량의 설탕을 넣어도 영락없이 상한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우선 설탕을 정량의 삼분의 이 정도만 넣고 나머지는 발효 과정을 봐 가면서 그때그때 위에 덮어 줘야 한다. 뚜껑을 꼭 닫으면 유독 가스가 빠져 나가지 못해 눈이 시큰거린다. 백 일만에 걸러서 이차 발효과정을 일 년 동안 거쳐야 비로소 음용할 수 있는 발효초가 완성된다.

사람살이도 발효초 만드는 과정과 마찬가지가 아닐지. 아기는 보기만 해도 예쁘고, 부모가 되어선 그 향기를 맡으며 아이들이 자라고 나중엔 미련 없이 이로운 물질은 다 내어주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니 말이다.

발효과정 일 년을 사람의 일생에 비유한다면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아마 열 달쯤 발효 과정을 거치고 두어 달쯤 남았을 것이다. 좋은 발효액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지.

일 년 후, 이 포도 발효초를 포도원 주인에게 내밀었을 때 그녀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아니! 그 떫고 시고 맛없는 열매에서 이렇게 깊은 맛이...'하며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고 눈까지 활짝 웃을 것이다.

그로 인해 포도원 주인의 어깨의 무거운 짐을 잠깐이라도 내려놓고, 나는 그녀의 티 없는 표정에 긴 행복감을 느끼는 꿈을 꾼다면 욕심일까.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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