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장엄한 바닷소리에 푸시킨 박물관에서
시속에 애정을 담아 모스크바를 노래한 시인
모스크바 한국어과에 복사기 선물

우리 음성 설성공원 옆에 길을 무영로라 부르듯이 러시아의 도시 곳곳은 작가들 음악가들 화가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곳이 많다.
일테면 푸시킨시나 모스크비치들이 휴일이면 몰려 보트를 타고 노천극장에서 생음악을 연주하기도 하고 시낭송회도 열리는 고리키공원이 있는가하면 고리키의 집 박물관도 있다.
또한 차이코프스키 콘서트홀, 작가 생활의 원숙기를 보낸 체호프의 집 박물관도 있다.
그 많은 박물관과 생가 기념관 공원 등을 오로지 국가에서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시를 매우 좋아한다. 두세명이 모이면 시를 낭송하고 시인을 추모한다.
그러한 분위기 탓인가, 시 속에 애정을 담아 모스크바를 노래한 연유로 푸시킨의 모스크바라고도 불러지는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나가 시인이 되는 듯 감성이 살아난다.

안녕, 바다여
잊지 않으리
당신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저녁 한 때
당신의 장엄한 바닷소리에
어느 날이든 어느 날이든
귀를 기울이리라.

이 시는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의 작품이다.
2000년 5월 모스크바의 곳곳에는 푸시킨이 지나간 자리가 더더욱 새로워지고 있다.
그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이 되어 그의 모든 것을 후세에게 전해주고 오늘도 끊임없이 찾아드는 문학 애호가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모스크바는 물론 전 세계에서 푸시킨이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시킨은 1799년 귀족의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유년시대부터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제실고등학교 재학중에 이미 뛰어난 시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졸업 후에 페데르스브르크의 외무성에 취직이 되고 이 해에 송시 <자유> <농촌>등 정치적 자유를 구가한 시를 발표하여 그것이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고독하고 불우한 유배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 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
이때 로맨티시즘의 특질이 강한 사실적 시형소설(詩刑) 에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였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스페이드의 여왕><대위의 딸>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그리하여 후기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는 모두 푸시킨에서 비롯된다.
모스크바 곳곳에는 푸시킨 동상이 섰다.
박물관의 각 방에는 19세기 전반의 풍속이 재현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가구,그림,서적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가 어떠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살았는가 짐작하게 한다.
박물관에는 유년시절의 가족사진에서부터 청년기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자필 삽화가 들어있는 원고초본이나 그의 저서 그와 교유했던 당대의 작가들 초상화 등 소품들이 그의 손길과 숨결을 느끼게 했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 것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의 아내 나탈리아의 초상화였다. 그토록 영민한 작가에게도 질투의 정염은 끓었을까.
그의 아내 나탈리아는 빼어난 미모였으나 남편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교계에 출입하여 경제적 부담만 무겁게 했다.
또한 그녀를 짝사랑한 근위사관 단테스와 결투로 푸시킨은 치명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그의 나이 아까운 38세였다.
나는 지금 두 세기를 거쳐 내게 불어오는 장엄한 바닷소리를 듣고 있다.
또한 왜 그를 사랑하는가 하는 데에 대한 분명한 답을 느끼고 있다.
그의 작품의 기조가 농노제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한 휴머니즘 때문이다.
그의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지주와 농노, 인텔리켄쟈와 민중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취급하고 조국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푸시킨, 어쩌면 그는 모든 작가들이 가야할 길을 저 장엄한 바닷소리로 지금도 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는 모스크바 200년전 그가 섰던 마당에 내가 서서 멀고 험한 작가의 길을 생각하고 있다.
몹시 부러웠던 모스크바 대학 국립대학의 의미
러시아 뿐만 아니라 동구권에서 가장 당당한 대학이 바로 모스크바 대학이다.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쌓인 바라뵤비 언덕 한켠에 1953년에 세워진 스탈린 양식의 대학은 똑같은 건물이 사면으로 세워져 웅장하다.
중앙 30층짜리 건물 부분은 대학의 관리부가 있고 양쪽 17층짜리 날개 부분은 학생 기숙사로 사용된다.
학문의 전당에는 주로 이공화학 계열의 14학부가 있다.
내가 이대학을 부러워 했던 이유는 3만 2천명이나 되는 학생수 때문이 아니고 웅장한 건물 때문도 아니다. 많은 러시아 대학들이 정부 요인의 자제들을 연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모스크바 대학은 실력에 의해 학생들을 선발한다.
일단 선발된 학생들은 학비와 숙식비 등 일체를 국비로 충당하며 오로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두뇌 좋고 실력있으면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고 졸업후에는 러시아 사회에서 엘리트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공부한 과정이 어려워 한 과에 40명이 입학을 하면 4명 졸업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모스크바 대학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도스또엡스키 묘지와 박물관에 갔을 때 안내를 맡아준 학생은 상당한 실력을 보여 주었는데 그가 바로 모스크바 대학 한국 유학생이었다.
그 먼 타국에서 도스또엡스키를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마치 내 아들인양 대견하고 든든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민들레가 함박핀 교정에서 사진을 찍으며 우리나라도 서울대학 하나쯤은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이 되어 실력있는 학생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다.
거리에는 고물차가 굴러가고 시내 큰 건물들은 텅 비어 있고 사람들이 우수어린 얼굴로 살고 있다 해도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대학의 불빛으로 러시아의 내일은 다시 밝아오리라는 희망을 갖기에 충분했다.
모스크바 대학 한국어과 복사기를 선물하고 이번 펜대회 참가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모스크바 대학 한국어과에서 학생들과 함께 특강을 듣고 정성을 모아 복사기를 한 대 선물한 것이다.
이 한국어과에는 유럽 여러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한국을 배우기 위해서 입학을 한다.
좁은 복도로 10여분 올라간 곳에 조그마한 강의실이 있었고 20명 넘는 학생들이 반겨 주었다.
고려대학 김종길 교수님이 "한국시에 있어서의 문제"에 대하여 명강의를 하였다. 강의중에 판서를 하기 위해 백묵을 들었으나 칠판에 글씨가 써지지 않았다.
백묵의 품질이 말이 아니어서 복사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을 알고 싶고 배우려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각자 가지고 간 저서를 기증하고 내려오면서 지구촌이 한가족이라는 것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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