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숙

요즘 재미있는 소설을 하나 만났다. 뒷내용이 궁금해서 아침밥 준비 중에도 책을 읽었다.

된장 풀어 배춧국을 안치고 급한 마음에 물 묻은 손으로 책장을 넘겼더니 종이가 물기를 머금고 부풀어 올랐다.

물에 젖은 책을 보면서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잊고자 해도 잊혀지지 않고 내 무의식의 심연에 가라앉아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고 지탱해 주는 내면의 상처이자 양심이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난생 처음 동화책을 빌렸다. 담임선생님을 따라 책장이 있는 교실에 들어가 그 곳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을 보며 느끼던 신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커다란 자물통이 달려 있는 책장 유리문을 열쇠로 열고 책을 꺼내 나에게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책장은 가정집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릇장 정도의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교과서 외에 책을 접할 일이 없던 산골아이에게 그것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신기한 세계였다.

그 신기한 책을 집에 다다를 때까지 책가방 속에 넣어 둘 수가 없었다. 책을 읽으며 산 밑으로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집으로 오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며 논도랑에 책을 빠뜨렸다. 마를수록 점점 부풀어 오르는 책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했다. 며칠을 끙끙 앓으며 고민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반납한 책을 보며 선생님은“이 책이 왜 이렇게 됐지?”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계집아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선생님 곁을 물러났다.

그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나는 두 가지 거짓말을 더했다.

저금할 돈을 학교 운동장에서 잃어버리고 저금했다고 엄마를 속였고, 주산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아끼던 초시계의 바늘을 망가뜨리고 저절로 부러졌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선생님은 “저절로 부러졌다면 내가 가지고 있어도 부러졌겠지”하셨다.

50년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이유로, 남을 위한다는 핑계로, 아니면 내 이익을 위해서….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당신은 여태까지 살면서 어떤 큰 거짓말을 하였소?”라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초등학교 때의 세 가지 일을 떠 올릴 것이다.

질책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택한 거짓말은 두고두고 어린 마음에 커다란 짐이 되었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과 부모님께 수많은 잘못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고 혹은 매질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 잘못을 모르는 체 말없이 용서해 주신 선생님만 내 마음에 생생할 뿐….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할 나이에 겪었던 이 사건들은 나이 먹을수록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박혀 나를 지배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때 엄마와 선생님이 내 말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추궁하여 진실을 밝혔다면 어땠을까. 한순간에 신뢰를 잃은 딸이요 제자가 되어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내 두려움을 이해해주신 속 깊은 어른들에게 감사드린다.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거짓말을 해서 받는 벌이 잘못해서 받는 벌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늘 강조한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 마음마저 속일 수는 없다는 걸 몸소 체험했으니까.

 

<가섭산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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